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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532
한자 場市
영어공식명칭 Market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남석

[정의]

조선 후기부터 근현대까지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시장.

[개설]

『만기요람(萬機要覽)』 각전 조(各廛條)에 “행상이 모여서 교역하고는 물러가는 것을 장(場)이라고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이 장(場)이 바로 장시(場市)다. 장시는 15세기 말 전라도 지역에서 나타난 이래, 조선 후기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즉, 1830년대 시장을 정리하고 있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예규지(倪圭志)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1,052개의 정기 시장이 있었다고 하였고, 이보다 앞서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전국에 1,064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한다. 1777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나타난 전국 고을 수가 339개이니, 한 고을의 평균 장시 수는 약 3개가 되는 셈이다.

장시는 보통 3일, 4일 또는 5일 간격으로 정기적으로 열렸고, 각 장시 사이의 거리는 3~40리를 표준으로 하였다. 이것은 장시 상인인 보부상의 이동과도 부합되는 거리였다. 장시에서는 주민들이 생산한 상품을 교역하였으나, 주로 행상인 보부상이 장을 순회하면서 각지의 물산을 공급하였다.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 덕산면사무소에 있는 예덕 상무사(禮德商務社) 유품을 보면, 보부상들이 예산과 덕산은 물론 당진과 면천을 활동 거점지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당진 지역의 장시는 상당히 번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형성과 변천]

당진 지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어업이 성행하였고 이를 위한 포구[항구]가 발달하였다.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의 한진항(漢津港)에서는 준치 잡이가 성행하여 ‘썩어도 준치’라고 하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이 고장의 특산품이었다. 주민들은 이와 같이 바다에서 잡은 생선과 농산물을 교환하기위하여 시장을 열었고, 대규모의 물산이 거래되었다. 이 때문에 당진 지역의 장시는 언제부터 개시(開市)되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타 지역에서의 장시 발전과 발맞춰 당진 지역도 활발하게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원경제지』 당진 편과 면천 편에 의하면 당진 지역 장시는 모두 5곳이었다. 당진군에 속한 장시는 당진 읍내장[2·7·4·9일], 세거리장[5·10일]이다. 세거리장은 현재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에 있던 장이다. 면천군에 속한 장시는 면천 읍내장[2·7·5·10일], 범근천장[1·6일], 기지장[1·6·3·8일]이다. 범근천장은 ‘버그내장’으로 현재 당진시 합덕읍 운산리에서 열린 장이다. 기지장은 현재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리에 열린 장이다.

당진 읍내장과 면천 읍내장이 열흘에 4회 개시한 것은 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두 곳의 거리는 약 10㎞에 해당되며 개시일이 2일과 7일이 중복되어 각자 시장을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별한 장시는 기지장이다. 기지장은 당진 읍내장과 4㎞의 거리에 불과하며, 면천 읍내장과 12㎞에 해당된다. 또한 기지장은 당진과 면천 읍내장과 개시일이 겹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당진과 면천 지역의 중앙 장시는 기지장으로 여겨진다. 보부상단과 거래 물량이 기지장에 모였다가 당진과 면천으로 흩어지고 다시 기지장으로 모이는 반복 형태였다. 한편 세거리장은 정미면 천의장과 연결되어 서산으로 이동하였고, 버그내장은 덕산장과 고덕장을 통해 예산군과 연결되었다.

조선 후기 번창했던 당진의 장시는 한말에 이르러 개시 일자가 일부 조정되었다. 『충청남도 도세 일반』(1908)에 의하면, 당진군의 장시는 당진읍 시장[5·10일]과 삼거리장[2·7일]뿐이다. 면천군의 경우도 면천 읍내장[2·7일]과 기지장[1·3·6·8], 범근장[1·6일], 남원장[4·9일]으로 정비되었다.

특이한 점은 읍내장의 개시일이 줄어든 대신, 기지장은 여전히 견고하다는 점이다. 기지장은 한말에 이르도록 당진과 면천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지형적으로 해산물과 농산물이 만나는 중앙 지대에 해당하였고 교통이 발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한 기지시 줄다리기라는 전국적인 민속 행사가 열리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지장과 범근장[버그내장]은 여전히 같은 날에 개시되었다. 범근장은 당진의 동남부에 해당되고 평야 지대의 거점 도시였다. 그리고 거래 품목도 미곡 중심으로 특화되었기 때문에 기지장과 차별성을 갖고 운영되었다. 특이한 점은 남원장이 새롭게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남원장은 현재 당진시 우강면 부장리의 포구이다. ‘똑딱선’이라 불리던 증기선의 운항과 함께 해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남원포’에 장시가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한말의 당진 지역 장시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기까지만 하여도 당진장과 합덕 버그내장을 비롯하여 몇 개의 장시가 유지되었으나, 1995년경 이후에는 당진장[5·10일]과 합덕장[1·6일], 신평장[2·7일] 정도로 축소되었다. 2016년 현재 합덕장과 신평장은 유명무실해졌고, 당진장만이 유지되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을 정도로 번창한 장이 되었다.

[주요 장터]

지금까지 당진 지역에서 개설되었던 장시는 모두 18곳이 알려지고 있다. 그중에 해안 포구에 위치하며 생선배가 들어오거나 혹은 미곡을 경인 지역으로 실어 나르는 시기에 열리는 장시가 있었다. 대표적인 장터로 한진장[송악읍 한진리], 가락 장터[송악읍 도원리], 남원장[우강면 부장리] 등이 있다.

당진 내륙 읍면의 치소에 위치하며 해당 지역의 행정과 경제를 활용하며 번창한 장시는 당진장[당진시 읍내동], 면천장[면천면 성상리], 버그내장[합덕읍 운산리], 석문장[석문면 통정리], 천의장[정미면 천의리], 세거리장[고대면 용두리], 금천장[신평면 금천리], 순성장[순성면 봉소리], 기지장[송악읍 기지시리], 송산장[송산면 상거리] 등이 있다.

그 외 신작로의 개설과 교통의 변화, 이에 뒤이은 인구의 이동 등으로 변동된 장터로 당진 구시장[당진시 읍내동], 중흥리 장터[송악읍 중흥리], 해당화장[우강면 세류리], 고대 신시장[고대면 용두리], 거산장[신평면 거산리] 등이 있다. 특이한 점은 당진 지역 대부분의 장터가 현재까지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장터가 도시의 재개발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고, 단순히 인구의 감소와 그에 따른 수요의 감소로 인한 공동화 현상에 손님들만 줄었기 때문이다.

[특기 사항]

주민이 많이 집결하는 장날에 민족 운동을 전개한 사례는 전국적으로 공통적이다. 당진 지역의 장터에서 발발한 민족운동은 2건이다. 우선 1906년 4월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리의 기지장터에서 의병 창의가 있었다. 주인공은 송산면 매곡리에 거주하던 최구현 의병장이다. 최구현(崔九鉉)[1866~1906]은 무과에 급제하고 군부에서 근무하던 중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일제에 피탈되자 기지장터에 병오 창의도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37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면천성을 공격하였고, 치열한 항쟁을 거친 후 1906년 8월 소난지도에서 피체되었다. 그리고 옥고의 여독으로 1906년 12월 사망하였다. 기지장터가 의병 항쟁의 거점지로 활용된 사례다.

또 하나의 사례는 1919년 4월 4일 발발한 천의 장터 독립 만세 운동이다. 1919년 3월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였던 대호지면도호 의숙(桃湖義塾) 출신 유생들은 귀향한 후, 천의장날을 이용한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이인정 대호지면장을 설득하였고,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천의 장터에 이르는 신작로를 보수하라는 면장 지시서를 대호지면 9개 리 주민들에게 발송케 하였다. 그 결과 570여 전 주민들은 면사무소에 집결하였고, 면장과 유생들은 주민들을 인솔하여 7㎞에 달하는 천의 장터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000여 명에 이르는 장터 주민들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독립 만세 운동은 서산과 당진 지역의 최대 독립 만세 시위였다. 그 결과 200여 주민이 피체되었고, 현재 정부는 약 120명의 주민에게 건국 훈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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