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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 의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97
한자 沔川義兵
영어공식명칭 Myeoncheon Faithful Arm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면천 의병 을사늑약 체결 계기로 거병
발생|시작 장소 면천 의병 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서 봉기한 구한말 항일 의병.

[개설]

대한 제국 시기 충청남도 면천군에서 일제 침략에 항쟁하는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이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계기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이 피탈된 데 항의하여 거병하였다. 또한 1907년 대한 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더욱 치열하게 항쟁하였다. 대표적인 면천 의병장으로는 최구현(崔九鉉)·이만식(李晩植)·도중삼(都仲三)·박계문(朴桂文)·김성백(金成伯)이 있다.

[역사적 배경]

충청남도 면천은 내포 지역의 중심에 있고, 예당평야를 아우르는 곡창 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와 접하고 있다. 평야 지대의 주민들은 빈부의 격차가 심하였고, 농민 대부분은 재경 지주의 농경지를 소작하는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조선 말 지배층의 수탈과 일본 상인의 농촌 침투에 저항하는 반봉건·반외세의 투쟁 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면천 지역은 성리학적으로 기호학파에 속하였고, 화서 이항로(李恒老) 계열의 위정척사 사상이 매우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항일 의병장이 배출되었고, 농민들은 항일 의병으로 변화하였으며,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 지역 의병과 연합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면천 의병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였다.

[경과]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민영환을 비롯한 애국지사는 자결로 결사 항전의 의지를 드러냈고, 열혈 청년들은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이완용 등의 처단을 시도했다. 한편 면천군 신북면[현 당진시 송악읍 오곡리] 출신의 안종화(安鍾和)[1860~1924]를 비롯한 우국지사들은 각종 상소 활동을 전개했고 을사오적 처단과 조약 폐기를 요구했다.

또한 면천 지역의 우국지사들 역시 을사조약의 강제 늑결에 항거하여 즉각적으로 의병을 봉기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최구현이 있다. 최구현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다음 해인 1906년 4월, 기지시에 병오 창의 도소(丙午倡義都所)를 설치하고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에 격문을 발표하여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최구현은 1906년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일제의 경찰대와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결국 퇴각했다. 이후 의병 36명을 인솔하여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소난지도에는 이미 화성 창의소 홍일초 부대가 있었다. 6월 7일에는 홍주성에서 패한 홍주 의병 차상길이 15명을 인솔하여 합류했다.

최구현 의병은 1906년 6월 18일 면천성을 다시 공격했다. 이때는 소난지도의 의병 세력인 홍일초 부대와 합세했다. 이들은 면천군에 돌입하여 군수 이교영(李喬永)을 포박하고 이속(吏屬)을 난타하고 결전 350냥과 양총 5정, 탄환 85발, 환도 2정을 탈취했다. 또한 최구현 의병장은 1906년 8월 중순에도 다시 면천성을 공격했다. 이때 군수는 홍주 의병이 면천군의 환곡미 200석을 가져간 것을 채우기 위해 지방에 출장 중이었고 한다. 거듭되는 최구현 의병장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관군과 일본 경찰대는 1906년 8월 24일, 의병의 본거지인 소난지도를 급습했고 최구현을 체포했다. 최구현 의병장은 면천에 끌려와 일본 수비대의 심한 고문을 받고 토지 30결을 탈취당하고 풀려났다. 그리고 음력 1906년 12월 23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최구현 의병장이 일제에 맞서 격렬하게 항쟁할 무렵, 면천 지역 지사들은 홍주 의병에 참여하기도 했다. 홍주 의병은 중기 의병기 대표적인 의병 항쟁이며, 충청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의병 항쟁으로 널리 알려진 거사였다. 홍주 의병은 1906년 3월 14일 청양의 정산에서 봉기하여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 경찰 등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나, 5월 30일 밤 일본군의 공격으로 참모장 채광묵을 비롯한 수백 명이 전사하고 70여 명이 서울로 끌려갔으며 그중에 유준근(柳濬根)[1860~1920] 등 9명은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이 홍주 의병에 면천 출신의 지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홍주 의병 유격장 이만식(李晩植)이 있다.

이만식은 면천의 한진 출신이며, 1906년 홍주성 전투에서 유격장으로 전투를 지휘했다. 홍주성 전투 이후 이만식은 박창로(朴昌魯)·강재천(姜在天)과 함께 정산의 칠갑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했다. 이만식은 칠갑산 전투에서 일본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1907년 1월 말경에는 맹달섭과 김광옥 등의 의병들과 함께 부여의 일본인 가옥을 공격하여 일본인 3명을 사살했다. 맹달섭은 홍주 의병의 전투 과정에서 북문 수비대장으로 일본 순사를 죽이는 전과를 올린 인물이다. 이만식은 그 후에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경기도로 피신하여 죽산 일대에서 경기 의병과 함께 활동하다가 다시 추격을 받아 당진 인근의 도서 지방으로 옮겼다. 이만식과 맹달섭은 당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항쟁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해적·수적으로 활동하던 맹달섭은 1910년 일제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1907년 8월 구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일제의 무력 침탈은 한국 군대의 격렬한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일본군과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으며, 서울을 벗어난 이들은 각지에서 의병대를 조직하여 무력 항쟁의 대열에 가담했다. 해산 군인의 가담은 의병 전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면천 지역의 의병은 군대 해산 직후부터 다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면천 출신의 도중삼(都仲三)·박계문(朴桂文)·김성백(金成伯) 등이 있다. 또한 당진 지역에서도 고대면 출신의 정주원(鄭周源)[1870~1925]과 손응현(孫應鉉)을 비롯하여 외맹면[현 석문면] 출신의 정선경(鄭善京)·하군배(河君輩), 당진면 출신의 심주현(沈周鉉), 그리고 최종성(崔鍾成)·최동식(崔東植)·신경춘(申景春)이 있다.

[결과]

면천 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거병하였고,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격화되었다. 의병들은 면천 출신으로 면천읍성과 홍주성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의병들은 면천과 당진, 서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동시에 서해안을 통해 경기 지역에서도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무력의 절대적인 약세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대부분 항전 이후 순국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면천 의병의 항쟁은 당진과 면천 지역의 민족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 준 민족의식의 발현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반봉건 반외세 투쟁이었던 동학 농민 운동에서 격렬한 항일 투쟁의 결기를 드러낸 바 있었다. 한말에 발발한 면천 의병은 이와 같은 일제 침략에 대항한 면천 주민들의 투쟁 의식을 여과 없이 드러낸 항일 운동이라 하겠다. 또한 면천 의병의 항쟁은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10일, 면천 공립 보통학교[현 면천초등학교] 학생 독립 만세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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