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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077
한자 大蘭芝島
영어공식명칭 Daenanjido Island
이칭/별칭 난지도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지명/자연 지명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추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구간 대난지도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해당 지역 소재지 대난지도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지도보기
성격
면적 5.082㎢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에 속하는 유인도.

[명칭 유래]

예전에는 석문면에 소속된 섬으로 대난지도, 소난지도 구분 없이 보통 난지도(難知島)로 불렸다. 지명 한자도 어려울 난(難) 자로, 원래 난초 난(蘭) 자가 아니다. 옹진군 대부면 풍도와 석문면 난지도 사이의 물살이 세서 조운선이 다니기 어렵기에 이름을 ‘난지도(難知島)’라고 지었다.

지명 ‘난지도(難知島)’에서 ‘난지도(蘭芝島)’로 바뀐 연유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하씨 일가족이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 풍랑에 밀려 표류하다가 난지도에 상륙한 후 그곳에서 어느 날 밤 하씨는 청룡과 황룡이 서로 다투는 꿈을 꾸던 중 황룡이 하씨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내일 다시 청룡과 싸움을 할 것인데 당신이 나에게 화살을 쏘아 달라.”라고 했다. 하씨가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니 정말 옆에 화살과 활이 놓여 있고 지정해 준 장소에서 청룡과 황룡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씨는 ‘설마 자기를 쏴 죽여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가.’ 하는 설렘 속에 황룡의 부탁을 외면한 채 청룡을 쏘았으나 빗나가 황룡이 화살을 맞게 되었다.

그 후 청룡은 하늘로 올라가고 화살에 맞은 황룡의 꼬리부분이 떨어져 나가면서 섬의 한쪽 끝을 치니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끝부분이 떨어져 나가 소난지도가 되었다. 이후 하 씨는 자기가 잘못하여 황룡이 죽은 것을 후회하고 산에 올라가 정성껏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부터 용이 죽은 자리에 이상한 풀이 나서 뜯어보니 난초(蘭草)였고, 그 후 하씨의 무덤 위에는 지초(芝草)가 났다 하여 첫 글자 둘을 따서 ‘난지도(蘭芝島)’라 했다고 전한다.

[자연환경]

난지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선배산[118m]이고, 용못이 1개 있다. 섬의 서쪽에 당진시 유일의 난지 해수욕장이 있고, 동쪽에는 난지 포구가 있고 중앙에 석문 초등학교 난지 분교가 있다.

[난지도에 대한 기록]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대난지도는 당진현 내맹면 대난지도리 지역으로 1760년 당시 호수는 44호, 남자 56명, 여자 107명 등 총163명이 살고 있었다. 여자가 2배 이상 많은 여초섬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당진현 조에 “난지도수 재현북해중 주삼십리 당진포만호 분병수지(難知島戍在縣北海中周三十里唐津浦萬戶分兵戍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난지도 군영이 당진현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는 30리이며 고대면 당진포의 만호가 군병을 나누어서 지킨다.”라는 뜻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고대면 당진포에 주둔하던 수군만호의 병사가 대난지도 말막금 지역에 파견을 나가 지키던 군사 요충지였고, 난지도의 한자가 현재 사용하는 한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세금을 곡물로 받아들여서 주로 육로보다는 하운이나 해운으로 운반하였다. 곡물은 강이나 바닷가에 창(倉)을 세워서 일시 보관했다가 쾌청한 날을 택해서 서울 마포의 경창으로 운반했는데, 충청남도 북서부 해안인 태안반도 안흥항 일대와 당진 지역의 석문면 교로리 난지도 북서 해운로가 아주 험하여 안흥항은 ‘난행량(難行梁)’, 난지도는 ‘난지도(難知島)’라고 불렀다. 즉, 난지도와 풍도 사이에 물살이 너무 세서 조운선의 침몰이 자주 발생하자 ‘난지도(難知島)’라고 부른 것이다.

난지 염전이 있던 곳이 어항처럼 쏙 들어온 천연의 양항 구실을 하였으며, 소난지도 앞에는 우무도가 있어서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 주었다. 사실 소난지도는 옛날 경상남도, 전라남도 등지에서 세곡미를 싣고 서울 경창으로 가던 많은 조운 선박들이 풍랑을 피해서 쉬어가거나 한강이 결빙되어 조운선이 상륙할 수 없으면 얼음이 녹고,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던 포구였다. 많을 때는 100여 척의 조운선이 정박했다. 소난지도가 만원이면 대난지도에 배를 대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 대난지도소난지도는 조운선을 운행하는 전라도, 충청도 뱃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여지도서』 당진 편에 “대난지도리는 관아에서 60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호 44호 가운데 남자는 56명이고, 여자는 104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 지도』 당진 편의 내맹면 서쪽 해안에 난지도(蘭芝島)가 보인다. 『1872년 지방 지도』 당진 편의 남단에 대란지와 소란지로 구분하여 표현되어 있다. 『조선 지형도』 풍도 편에는 석문면 북쪽 바다에 대난지도가 확인된다.

[난지도 민요]

고대면 슬항리에 거주했던 차석기의 『풍도리지(風島里誌)』에는 난지도와 관계있는 민요 한 편이 실려 있다.

"네가 잘라서 일색이냐/ 낸들 으려서 일색이냐/ 풍도라 생길려면 석시나 있구/ 난지라 생길려면 석시나 없지/ 삼사월에 오는 배가/난지로 쫒겨가네"[석시: 폭풍을 대피할 수 있는 포구]

전라도 곡창 지대로 조세곡을 실러 나갔던 남편이 몇 달 만에 와도 폭풍우를 대피하는 포구가 풍도에는 없고 난지도에만 있어서, 기항하지 못해 얼굴도 못보고 다시 난지도로 들어가는 광경을 본 풍도 아낙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민요이다.

[현황]

본래 당진군 도동면 대난지도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석문면 난지도리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대난지도석문면 교로리에서 북서쪽으로 20리 떨어진 해상에 있는 당진시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은 5.082㎦, 세대수는 112세대, 인구는 204명[2014년 현재]이다. 대난지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소난지도, 우모도, 소조도 등의 섬이 연이어 산재해 있다. 천연 해수욕장인 난지도 해수욕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당진 9경 중 3경으로 불린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바다를 막아 염전을 만들고 농경지도 조성하였다. 전에는 포구 서쪽에 큰 난지 염전이 있었으나 현재는 개답되었다. 소난지도에는 홍일초 대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말 의병들의 무덤인 의병총(義兵塚)이 있다.

『한국 연안 수로지』 서해안 편에 의하면, “난지도 서쪽 약 900m에는 철도[해발 31m]가 있고, 섬의 북서쪽 부근에는 2.7m, 서측에는 7.1m, 북측만 내측에 4.9m의 간출암이 있다. 섬의 종쪽 만 내에는 2종 어항이 있고, 북측에 길이 190m의 선착장이 있어서 고조 시에 소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다. 섬의 북서쪽에는 해수욕장이 있고 인천항에서 대난지도, 풍도를 경유하여 여객선이 1일 1회 운항하고 있으며, 삼길포에서 대난지도 간 도선이 수시로 운행되고 있다. 대난지도 동쪽에는 5m 등심선 내에 천토(淺堆)가 있으며 남측도 위험한 암초가 있으므로 항해에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92년까지는 인천~풍도~난지도~삼길포 사이에 여객선이 운행되었지만, 지금은 중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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