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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41
한자 安晩洙
영어공식명칭 An Mansu
이칭/별칭 미산(眉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연표보기 - 안만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안만수 성균관 박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안만수 신간회 당진 지회 창설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49년연표보기 - 안만수 사망
출생지 안만수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안만수 거주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묘소 안만수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성격 한학자|민족 운동가
성별
본관 광주(廣州)
대표 경력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한학자이자 민족 운동가.

[개설]

안만수(安晩洙)[1879~1949]는 한말에 태어나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역임하고 법관 양성소를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고향으로 낙향하여 지역 사회의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안만수의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미산(眉山)이다. 아버지는 안종선(安鍾善), 숙부는 함재(涵齋) 안종화(安鍾和)이다. 풍애(楓崖) 안민학(安敏學)[1542~1601]의 12대손이다.

[활동 사항]

안만수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안만수는 일찍이 숙부인 안종화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3년 1월, 25세에 성균관 박사로 판임관(判任官) 6등에 임명되었으며, 1907년에는 법관 양성소 생도로 입교하였다. 당시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발기한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국채 보상 운동은 요원의 불길과 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남녀노소와 직업을 막론하고 의연금을 냈다. 당시 안만수도 5환을 의연금으로 납부하였다.

안만수는 보학(譜學)에 능통하고 필법이 정교하여 유림 사이에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1875~1947], 동강(東江) 김영한(金甯漢)[1878~1950] 등 당대의 서예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당진시 정미면 신시리 출신의 한학자 시남(詩南) 이병태(李炳台)[1910~1992]가 안만수에게서 수학하였다고 전한다.

안만수는 일제 강점기에는 신간회 활동을 전개하여 1927년 신간회 당진 지회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조선 총독부의 창씨개명에 홀로 끝까지 거부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등 항일 정신이 뚜렷하였다. 안만수는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안병석(安秉奭)[1923~1984]이다. 안병석은 서울 휘문 중고등학교와 고려 대학교 법정대 출신으로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 1956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에 한국 농구 대표 선수로 참가하여 국위를 선양한 체육인이자 예술인이었다. 안만수는 1949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각종 시(詩)와 서(書) 등 안만수의 유작 다수가 전한다.

[묘소]

안만수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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