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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49
한자 漢陽趙氏
영어공식명칭 Hanyang Josi|Hanyang Jo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550년경 - 한양조씨 당진 입향
본관 한양(漢陽) - 현 서울특별시
입향지 한양조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 2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한양조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묘소|세장지 한양조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성씨 시조 조지수(趙之壽)
입향 시조 조구(趙球)

[정의]

조지수가 시조이고 조구가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시조는 조지수(趙之壽)이며, 고려 시대 문벌을 형성했던 가문이다. 조선 시대에도 명문으로 자리 잡았던 한양조씨 일문 중, 평촌파 조구(趙球)가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낙향하였다. 그 후 조구의 손자인 조징(趙澄)은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에 이거하여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15대 450년을 내려오면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였고, 당진시의 대표적인 성씨로 자리를 잡았다.

[연원]

한양조씨는 한양[현 서울특별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인 조지수는 고려 무신 집권기 명종·신종·희종·강종이 재위하였던 시기에 조순 대부(朝順大夫)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조지수의 아들인 조휘(趙暉)는 쌍성총관부의 총관을 지냈고 그 후손들이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걸출한 인물을 다수 배출하여 한양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한 한양조씨는 평촌파인데, 시조 조지수의 9세손인 조윤영(趙允瑛)이 경기도 평촌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평촌파라고 불린다.

[입향 경위]

한양조씨가 당진에 입향한 것은 12세 조구에 이르러서였다. 한양조씨 족보에 따르면 조구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생몰 기간이 누락되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구의 묘소가 당진시 합덕읍 도곡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진 지역의 낙향조로 여겨진다. 조구의 묘소는 최근에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의 선산에 이장하였다. 조구의 묘소를 이장하기 전에 교로리에 묘소가 있었던 인물은 조구의 손자인 조징이었다. 족보에는 ‘충의(忠義)’로만 기록되어 있어서 그 의미는 알 수 없으나 국가로부터 시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조구의 후손들은 석문면 교로리송악면 봉교리, 고대면 대촌리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중심 문중은 석문면 교로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석문면 교로리에 거주하는 한양조씨의 입향조는 시조의 14세손인 조징으로 볼 수 있다.

12세 조구와 14세 조징의 낙향 경위에 대하여 전해 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이들이 현재 27세까지 내려왔고 당진에서만 15대가 거주하였음을 고려할 때, 낙향 시기는 450년 전인 1550년경으로 추정한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한양조씨의 대표적 인물인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정치적으로 희생당하자 한양조씨는 가문의 보전을 위해 전국적으로 흩어져 은둔한 것으로 보인다. 한양조씨 평촌파도 이 같은 배경으로 당진까지 낙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황]

한양조씨 평촌파는 석문면 교로리 2구에 거주하면서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등 평범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현대화의 물결이 급박하게 밀려오면서 대호 방조제가 축조되고 화력 발전소가 건설되며 왜목 마을 관광지가 조성되었다. 갯벌은 사라지고 어업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농경지가 대규모로 형성되었다. 또한 종전의 바닷가 마을은 관광과 팬션 마을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른 이주민의 증가와 마을 공동체의 분화는 전통적인 한양조씨 동족 마을을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양조씨들은 30호 정도 남은 문중을 바탕으로 음력 10월 10일 시향을 지내면서 지속적으로 동족 마을을 지키고 있다.

[관련 유적]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지역은 면내 주민의 90% 이상이 개신교를 믿고 있다. 그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당진시의 개신교가 석문면에서 시작되었다는 점과 관계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03년 석문면 난지도리에 개신교가 첫발을 내딛고, 1905년 석문면 삼화리 외창 마을삼화 교회가 설립되면서 당진의 개신교가 본격화되었다. 이 때문에 개신교에 대한 석문면 주민의 신앙심은 매우 각별하다. 이는 상대적으로 조상에 대한 제례 의식의 축소를 가져왔다. 석문면에 세거지를 이룬 성씨들은 여럿이나 제향 시설을 갖춘 성씨는 많지 않다. 문중 관련 유적도 다른 읍·면에 비하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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