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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173
영어공식명칭 Durae|Farmer's Cooperative Group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고대영

[정의]

충청남도 당진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마을 단위 등으로 만든 조직.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두레는 모내기, 김매기 혹은 길쌈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마을 단위 혹은 부락이나 소규모 단체로 결성되어 진행되어 왔다. 당진의 농업은 벼농사 위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적기에 물을 공급하고 많은 노동력이 일시에 투입되어야 했다. 벼농사의 특성상 단체 노동이 불가피했고, 이를 위해 마을 공동체에서 별도의 조직을 결성하고, 공동 노동을 추진했다. 두레는 마을 공동체의 중요한 기반으로 기능하였으며, 두레를 중심으로 한 정월 대보름 행사나 백중놀이, 농악패 활동을 비롯한 공동체 민속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두레의 변천]

두레는 조선 후기에 논에 물을 대서 벼농사를 짓는 수도작(水稻作)의 보급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조선 후기 다양한 작업의 특성과 작업 시기에 따라 분화가 일어났다. 두레의 주된 활동은 모내기나 김매기 등 벼농사에서의 공동 노동이었으며, 이러한 노동 가운데 마을의 잔치로서 호미씻이, 백중놀이 등을 함께 즐기며 노동의 고됨을 잠시 잊기도 하였다. 두레는 두레의 우두머리인 영좌와 중간 관리자인 공원, 일반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엄격한 규율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토지 사유제의 확립으로 대부분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추락했고, 이에 따라 자영농에 기초를 두던 두레는 급속히 소멸되었다. 그러나 마을 문화와 깊은 연관을 가진 두레의 특성상 해방과 6·25 전쟁 전후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최근까지도 두레의 공동체적 기능과 농악을 중심으로 한 유희적 기능, 약간의 공동 노동과 품앗이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두레의 흔적은 농악과 농기로 살펴볼 수 있으며, 행사로는 음력 2월 초하루에 하는 볏가릿대 세우기나 백중 때의 민속 등이 대표적이다.

[당진의 두레]

1891년 7월 면천에 귀양을 온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에 의하면, '두뢰'라는 이름으로 기세배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당진의 두레송악읍 가학리의 아랫가사울 두레, 월곡리 두레, 면천의 삼웅리 수미 두레, 사기소리 하부 두레, 송학리 후동 두레, 대호지면도이리사성리, 적서리의 두레, 신평 도성리의 양중 두레 등이 조사되었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소멸했고, 농악이 민속과 결합되어 흔적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남아 있는 흔적은 각 마을과 일부 친목 농악단으로 구성된 농악패의 활동이며, '농자천하지대본', 용 그림 등으로 구성된 농기이다. 농기는 두레의 선두에서 두레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깃발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당진에는 두레가 소멸한 다른 지역에 비해 농기와 농악의 전통과 보존, 전승이 비교적 잘되어 있는 편이다. 특히 기지시 줄다리기의 경우 가학리 두레와 틀모시 두레가 물위와 물아래를 대표하며 줄다리기를 주도했다. 이러한 전통이 지금도 남아 줄다리기 행사 시에 농기를 접수하는데, 줄다리기가 끝난 후 이기는 편 농기를 추첨해 송아지를 주는 독특한 풍습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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