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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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輿地圖書』 扶餘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실린 충청도 부여현의 읍지.
[개설]
『여지도서(輿地圖書)』 부여현(扶餘縣)은 18세기 중엽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여지도서』에 수록된 충청도 부여현의 읍지이다. 『여지도서』는 270여 년 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6]을 기초로 하였으며, 호구(戶口)는 1759년 기묘장적(己卯帳籍)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이를 볼 때 『여지도서』는 1760년 이후에 수집된 읍지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73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 초대 소장인 최석우(崔奭祐)[1922~2009]의 소장 서적 중에서 발견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여지도서』의 편찬은 1757년 홍양한(洪良漢)[1724~?]의 주청으로 진행되었다. 이후 왕명에 따라 홍문관(弘文館)에서 팔도 감사에게 명을 내려 각 읍에서 읍지를 올려보내도록 하였고, 모아진 읍지들을 성책하여 『여지도서』를 간행하였다. 『여지도서』의 편찬 목적은 앞서 편찬된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개수(改修)·속성(續成)에 있었다. 조선 시대 전국을 단위로 한 관찬(官撰)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서지]
『여지도서』는 총 55책으로 알려져 있으나, 경상도의 누락 읍지 두 책과 전라도의 누락 읍지 세 책은 분실된 것이다. 누락 읍지 다섯 책을 포함하여 원래는 60책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및 1개의 진지(鎭誌) 등 총 313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여지도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이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에서는 『여지도서』의 원문 데이터가 제공되고 있다.
[구성/내용]
『여지도서』는 대부분 읍지의 호구조의 기준 연도가 1759년인 점으로 볼 때, 1760년 이후에 수집된 읍지들로 성책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사회연구소에 소장된 『여지도서』의 구성은 제1책~제5책은 경기도, 제6책~제13책은 충청도, 제14책~제17책은 강원도, 제18책~제21책은 황해도, 제21책~제30책은 평안도, 제31책~제35책은 함경도, 제36책~제49책은 경상도, 제50책~제55책은 전라도로 이루어져 있다. 부여현에 대한 내용은 충청도의 내용이 수록된 제6책~제13책에 속하였다.
『여지도서』에는 각 읍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다. 부여현 읍지의 주요 구성은 방리(坊里)·도로(道路)·건치연혁(建置沿革)·군명(君名)·형승(形勝)·성지(城地)·관직(官職)·산천(山川)·성씨(姓氏)·풍속(風俗)·단묘(壇廟)·공해(公廨)·제언(堤堰)·창고(倉庫)·물산(物産)·교량(橋梁)·역원(譯院)·목장(牧場)·누정(樓亭)·사찰(寺刹)·고적(古跡)·인물(人物)·한전(旱田)·수전(水田)·진공(進貢)·조적(糶糴)·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봉름(俸廩)·군병(軍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회적·경제적인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부여현은 지금의 부여읍 및 규암면·은산면·초촌면 일대가 관할 구역이었다. 『여지도서』 부여현 읍지에는 18세기 중엽 부여현 10개 면의 명칭과 각 면에 속한 동리의 지명, 거리, 가구수[編戶], 성별 인구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부여현 마을 현황은 물론 지역의 사회 경제 실상을 살필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