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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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津都督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에 있었던 삼국 시대 당이 설치한 군정 기관.
[개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한 후 당나라는 백제 고토에 대한 직접 지배를 위하여 통치 기구를 설치하였다. 본래 5도독부를 두려고 하였으나 백제의 격렬한 부흥 운동의 전개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로 단일화하였다. 신라가 671년에 사비 지역을 차지하여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실질적인 기능은 정지되었으나 웅진도독부가 요동 지역으로 옮기는 676년 2월까지 명목상으로 백제 고토에 존재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660년 백제를 정벌한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을 직접 지배하기 위하여 5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인을 선발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으로 본래의 계획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하여 웅진도독부 아래 7주 61현을 두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20년 조에 “이때에 이르러 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의 5개의 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다스리게 하였고, 우두머리들을 발탁하여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였다[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各統州縣, 櫂渠長爲都督·刺史·縣令以理之, 命郎將劉仁願守都城. 又以左衛郎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라고 전한다.
『구당서』 권199[상], 열전 제149, 동이 백제 조에는 “이때에 이르러 그 땅에 웅진·마한·동명 등 다섯 도독부를 설치하여 각기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으며, 우두머리를 세워 도독, 자사 및 현령으로 삼았다. 좌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군대를 총괄 지휘하며 진수토록 하였다[至是乃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 各統州縣, 立其酋渠爲都督·刺史及縣令. 命右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總兵以鎭之]”라고 전한다.
[변천]
당은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사비도성에 백제도호부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5도독부, 37주, 250현을 설치하여 통치하려고 하였다. 웅진도독부는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공주에 설치하였고 왕문도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백제 유민들의 부흥 운동 전개로 당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실제 당군이 지배한 곳은 사비도성에 설치한 백제도호부와 북방성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뿐이었다. 661년 백제도호부가 폐지되었고, 이후 664년 3월 백제부흥운동군을 진압할 때까지 웅진도독부만이 기능을 하였다. 이후 웅진도독부 단일 체제로 하여 7주 51현을 설치하였고, 웅진에서 사비로 옮겼다. 백제 고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신라와 갈등이 심화되자 당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고, 백제인들을 지방의 자사와 현령 등으로 삼아 백제 고토에 대한 직접 지배를 획책하였다.
665년 7월에는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여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회맹하였다. 백제 출신들도 다수가 웅진도독부의 관료로 참여하였다. 난한은 웅진도독부 장사, 예군은 사마를 지냈다. 흑치상지는 사마와 절충도위, 대방주 및 지심주장사, 예식진은 동명주자사, 난무는 지심주자사, 법총은 증산사마와 웅산현령을 지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 신라는 점령지 지배권 문제로 전쟁을 하게 되었고, 신라는 672년에 백제 사비도성 지역을 차지하여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웅진도독부의 기능은 정지되었으며, 신라가 676년 나당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676년 2월 웅진도독부가 요동의 옛 고구려 건안고성으로 교치되면서 백제 지역에서 당의 지배는 종식되었다.
[의의와 평가]
웅진도독부는 당이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식민 통치 기구였다. 당은 백제를 지배하기 위해 백제인들을 관료로 임명하였지만 유민들의 부흥 운동과 신라의 반발로 실질적인 지배를 실현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