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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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部曲·所 |
영어공식명칭 | Hyang·Bugok·S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선용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 존재하였던 고려 시대의 특수 행정 구역.
[개설]
향(鄕)과 부곡(部曲)은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에도 존재하였고, 소(所)는 고려 시대에 생겼다. 향과 부곡의 주민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소의 주민들은 수공업이나 광업에 종사하며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나라에 바쳤다. 향·부곡·소의 주민들은 일반 양인들에 비하여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였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또한 과거 응시도 금지되는 등 일반 군현의 주민에 비하여 차별 대우를 받았다. 향·부곡·소는 고려 후기에 대부분 없어지고, 일부만 조선 초까지 남아 있었다.
향·부곡·소는 일반적인 행정 구역인 군현과 구별되는 천민들의 거주지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향과 부곡을 군현에 준하는 존재로, 소는 군현에 소속된 촌락의 하나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또한 향·부곡·소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군현의 일반 양인과 달리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 물품의 생산이라는 추가적인 부담을 지는 사회적 역할의 차이는 있지만 천민은 아니라고 한다.
[부여의 향·부곡·소]
고려 시대 부여 지역의 향·부곡·소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향은 부여 지역에서 별도로 보이지 않고, 소와 부곡의 존재만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임천군과 홍산현에서 각각 고다지소(古多只所)와 비도소(非刀所) 1건씩 보이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임천군의 고적에 안량부곡(安良部曲)과 고다지소·소라소(召羅所)·금암소(今巖所) 등 3곳의 소(所)와 홍산현의 고적(古跡)에 비도소·오합소(吾合所) 등 2곳의 소가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임천군의 고다지소는 “충청도 임천 북쪽 25리[약 100㎞] 떨어진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고, 소라소는 “충청도 임천 남쪽 15리[약 60㎞] 떨어진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금암소는 “충청도 임천군 남쪽 3리[약 12㎞] 떨어진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임천군에 있었던 3곳의 소 가운데 하나는 고려 충렬왕 때 응방(鷹坊)에 금을 납부하였던 가림현(嘉林縣)의 금소(金所)였을 것으로 보인다.
홍산현의 비도소는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되기 전에 이미 구점소(鳩岾所) 혹은 구참소(鳩站所)로 불렸는데, 비도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관아에서 북쪽으로 41리[약 164㎞]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비도소(斐道所)’로 쓰이고, 『부여지(扶餘誌)』에서는 ‘비도소(飛道所)’로 쓰였는데, 비도소는 관아에서 북쪽으로 45리[약 180㎞]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현의 고적에는 석전부곡(石田部曲)과 풍지소(楓枝所)가 있었다는 사실이 추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석전부곡은 부여현에서 서쪽으로 10리[약 40㎞] 떨어진 곳에 있고, 부곡이 해체된 뒤에 내복지촌(乃卜只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부여지』에서는 석전부곡이 부여현에서 서쪽으로 40리[약 160㎞]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름도 내지촌(乃只村)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부여 지역에 있었던 소와 부곡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고다지소는 현재의 세도면 반조원리로 추정된다. 반조원리는 본래 임천군 성백면 지역으로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어서 곶지, 고다지라 하였으며 고려 때 고다지소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