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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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州 |
영어공식명칭 | Lim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선용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일대에 있었던 고려 시대 행정 구역.
[개설]
임천 지역은 통일 신라 이래로 가림군(嘉林郡)이라 불리다가 고려 시대인 995년(성종 14)에 임주(林州)로 개편되면서 자사(刺史)가 설치되었다. ‘임주’라는 명칭이 995년에 처음 등장하였다. 그 후 1018년(현종 9)에 다시 가림현으로 바뀌었고, 1315년(충숙왕 2)에 지임주사(知林州事)로 승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995년에 임주자사가 설치된 것은 성종이 전국을 10도로 나누면서 하남도(河南道)에 소속된 11주 34현 가운데 하나로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1018년 현종이 전국을 다시 4도호·8목 및 5도·양계로 고치는 과정에서 임주를 가림현으로 바꾸고 읍격도 자사주에서 현령관으로 강등시켰는데, 1315년에 충숙왕이 원의 아패해(阿孛海) 평장(平章)의 부인 조씨(趙氏)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지임주사로 다시 승격시켰다.
[관련 기록]
임주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가림현 조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가림현은 본래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가(加)를 가(嘉)로 고쳤다. 성종 14년에 임주자사를 두었다가 현종 9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면서 현령을 설치하였다. 충숙왕 2년에 원의 아패해 평장의 처인 조씨의 내향이라 하여 지임주사로 승격시켰다. 속군(屬郡)은 1개, 속현(屬縣)은 4개이다.”
[내용]
부여와 석성이 공주의 속현으로 편제된 것과 달리, 임주[혹은 가림현]는 일찍부터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현으로 편제되었다. 그래서 홍산현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서천군에 해당하는 서림군(西林郡)·비인현(庇仁縣)·한산현(韓山縣)과 보령시의 남포현(藍浦縣) 등 1군 4현을 속군·속현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임주에 소속된 안량부곡(安良部曲)과 고다지소(古多只所)·소라소(召羅所)·금암소(今巖所)·금물촌처(今勿村處)뿐만 아니라, 홍산현의 비도소(非刀所)·오합소(吾合所), 서림군의 웅진명소(熊津溟所)와 임술소(林述所)·문조향(文照鄕), 비인현의 옥전향(沃田鄕), 한산현의 안보향(安保鄕) 안곡소(鷃谷所), 남포현의 횡천소(橫川所)도 관할하였다. 따라서 공주의 속현으로 편제된 부여와 석성은 비록 분리되어 있었지만, 최소한 지임주사가 설치된 동안에 임주는 충청남도 서남부 지역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원명국사(圓明國師) 충감(沖鑑)[1274~1338]이 1334년(충숙왕 복위3) 무렵에 보광사를 새롭게 중창한 것도, 원의 위소(危素)[1303~1372]가 1358년(공민왕 7)에 그러한 사실을 전하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보물]의 비문을 지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변천]
1315년 이후 고려 왕조에서 지임주사의 읍격을 유지하였던 임주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1394년(태조 3)에 명(明)의 환관이 된 진한룡(陳漢龍)의 요청으로 임주부로 승격되었다가 1401년(태종 1)에 다시 지임주사로 환원되었다. 또한 1403년에는 명의 환관이 된 주윤단(朱允端)의 요청으로 잠깐 동안 임주부로 승격되었다가 다음 해인 1404년 다시 지임주사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임주에서 임천(林川)으로 명칭이 바뀌고 읍격도 군(郡)으로 강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