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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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時代 |
영어공식명칭 | The Jose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엄기석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 역사.
[행정 구역]
조선 시대(朝鮮 時代) 지방 행정 제도는 1413년(태종 13)에 8도 체제가 확립되었다. 각 도 아래에는 330여 개의 부·목·군·현이 설치되었으며, 각 읍격에 맞게 부윤·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이 파견되었다. 충청도는 고려 시대에 양광도(楊廣道)였다가 8도 체제 정비 과정에서 충청도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충주목과 청주목을 중심으로 하는 충청좌도, 공주목과 홍주목이 중심이 되는 충청우도로 나뉘었다.
지금의 부여군은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 소속의 부여·임천·석성·홍산 4개 군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임천군, 부여현, 홍산현으로 개편되었고 1414년(태종 14) 석성 지역은 이산(尼山)과 합쳐 이성(尼城)이 되었다가 1415년 임천군의 고다진(古多津)과 왕래하는 요충지라 다시 석성현이 되었다.
임천군·부여현·석성현·홍산현 4개 군현은 모두 충청우도 소속이었으며, 금강 연안인 임천군·부여현·석성현은 공주목, 내륙 지역인 홍산현은 홍주목의 관할 하에 있었다. 각 군현의 읍격을 살펴보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기준으로 임천에는 종4품 군수, 나머지 부여·석성·홍산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었다.
[군사 제도]
조선 전기 지방 군사 제도는 세조 연간에 정비된 진관 체제(鎭管 體制)로 구성되었다. 진관 체제는 내륙 지방의 군사적 요충지에 중심이 되는 주진(主鎭)을 세우고 주진 밑에는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유사시 지역을 스스로 방어하는 독립적인 군사 체제였다. 각 도마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도내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는 주진이 있었고, 목사(牧使) 등이 예겸(例兼)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 또는 절제사(節制使)가 거진 단위로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거진 아래의 제진(諸鎭)은 군수(郡守) 이하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가 되어 군대를 지휘하였다.
부여 지역의 군현은 진관 체제 상 부여현·임천군·석성현은 공주진관, 홍산현은 홍주진관에 소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진관 체제가 폐지되고 진영이 설치되면서 부여 지역의 군현은 공주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경제 규모]
조선 시대 지리지에는 각 군현의 토지, 호구, 군정과 같은 경제적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 부여 지역에 위치한 군현의 사회 경제적인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는 대표적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부여 지역 군현의 사회 경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부여현의 간전(墾田)은 총 3,762결이고, 호구는 382호, 인구는 1,337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 17명, 수호군 29명, 선군이 228명이다. 임천군의 간전은 부여현보다 넓은 4,624결이고, 호수는 460호, 인구는 1,671명이다. 군정은 시위군 13명, 수호군 2명, 선군 287명이다. 석성현의 간전은 2,449결이고, 호수는 395호, 인구는 1,20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 11명, 수호군 23명, 선군 150명이다. 마지막으로 홍산현의 간전은 3,385결이고, 호수는 348호, 인구는 1,971명이다. 군정은 시위군 16명, 진군 16명, 선군 174명이다.
조선 후기 부여 지역을 살펴볼 수 있는 지리지로는 『여지도서(輿地圖書)』, 『호구총수(戶口總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이 있다. 이 중에서 19세기 중반 자료인 『대동지지』를 기준으로 부여군의 토지와 인구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여현의 토지는 한전(旱田) 2,338결, 수전(水田) 1,780결이고, 호수는 3,183호, 인구는 1만 5229명이었다. 임천군은 한전 1,772결, 수전 3,433결이고 호수는 3,824호, 인구는 1만 6935명이었다. 석성현은 한전 1,541결, 수전 1,540결이고, 호수는 1,535호, 인구는 7,809명이었다. 홍산현은 한전 1,972결, 수전 2,244결이고, 호수는 3,527호, 인구는 1만 4842명이다.
토지 면적의 단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조선 전기와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지만 인구 면에 있어서는 4개 군현 모두 조선 전기보다 큰 폭으로 증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통·통신]
조선 왕조는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하여 왕조 초반부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정비하였다. 육상은 역(驛)과 원(院)을 거점으로 하는 육상 도로망을 구축하였고, 수로 교통은 조운(漕運)을 기반으로 하여 세곡 등의 물자 수송을 하였다. 부여 지역에도 고려 초반부터 역과 원이 설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각 군현에 위치한 역과 원이 기재되어 있는데, 부여 지역에는 4개의 역과 10개의 원이 확인된다. 우선 부여현에는 은산역(恩山驛), 용전역(龍田驛), 고성원(古省院), 복천원(福泉院), 금강원(金剛院)이 있었고, 임천군에는 영유역(靈楡驛), 남원(南院), 고다진원(古多津院)이 있었다.
석성현에는 수탕원(水湯院)과 임강원(臨江院)이 있었고, 홍산현에는 숙홍역(宿鴻驛)과 녹한원(鹿閒院), 광명원(廣明院), 율현원(栗峴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 역과 원은 부여 지역 내부 및 인접 군현과 연결되는 육상 교통로의 거점 시설로 기능하였다.
조선 왕조는 교통수단 외에도 통신 수단인 봉수(烽燧)를 정비하여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봉수는 변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통신 제도이며, 일정한 거리마다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하여 소식을 알렸다.
조선 시대 부여 지역에 설치되었던 봉수로는 임천에 2곳, 석성에 1곳이 확인된다. 임천에는 개암산과 주산인 성흥산(聖興山)에, 석성에는 현 남쪽의 불암산에 봉수가 설치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