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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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川郡 |
영어공식명칭 | Imcheon-gun |
이칭/별칭 | 가림(加林),가림(嘉林),임주(林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엄기석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지역에 있었던 조선 시대 행정 구역.
[관련 기록]
조선 시대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를 살펴보면 임천군은 성주산(聖住山)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서천(舒川)·한산(韓山)과 함께 모시를 가꾸기 알맞은 곳이며 모시가 지역의 특산물로서 전국에서 제일인 지역이라고 하였다. 또한 강과 바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며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인접한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임천군을 수륙의 요충지라고 하였는데, 백제부흥군이 임천군에 있던 가림성(加林城)에 주둔하자 당나라 장수가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공격하기가 어렵다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내용]
임천군의 옛 이름은 가림(加林)·가림(嘉林)·임주(林州)였다. 임천군은 종4품의 군수가 파견되었으며, 종9품의 훈도(訓導)가 군수를 보좌하였다. 지역의 위치를 살펴보면 동쪽으로 석성현·은진현과 전라도 용안현, 서쪽으로 홍산현, 북쪽으로는 부여현과 인접하여 있었고, 남쪽으로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 함열현·한산군과 마주하고 있었다. 임천군 내에는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기준으로 동신리면(東新里面)·남산면(南山面)·백암면(白巖面)·인의면(仁義面)·세도면(世道面)·초동면(草洞面)·두모포면(豆毛谷面)·남동변면(南東邊面)·서변면(西邊面)·지곡면(紙谷面)·적랑토면(赤良土面)·대동면(大洞面)·상지포면(上之浦面)·홍화면(紅化面)·서가을화면(西可乙化面)·팔충면(八忠面)·박곡면(朴谷面)·북조지면(北調只面)·내동면(內洞面)·읍내(邑內) 등 20개의 면이 있었고, 각 면 내에는 점리(店里)·송산리(松山里)·관음리(觀音里) 등과 같은 동리가 편성되어 있었다.
지역 내 토성으로는 조(趙)·임(林)·방(方)·백(白)·적(翟)·신(辛)·전(田) 씨가 있었고, 이 중에 전씨는 촌성(村姓)이었다. 이 외에도 진(陳)·이(李) 씨가 있었는데, 다른 지방에서 이주하여 온 내성(來姓)으로, 이씨의 경우 고려 때 외오아국(畏吾兒國) 사람이었던 이현(李玄)이 귀화하여 통역한 공로가 있어서 임천군에 적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임천군 내 고다지(古多只)를 적으로 하는 조씨(趙氏)도 있었는데, 임천군 이속 계급의 성씨이다. 조선 전기와 후기 사이의 토성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지역 내 지배 세력 변화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임천군의 경제적 상황을 19세기 중반 자료인 『호서읍지(湖西邑誌)』를 통하여 살펴보면 우선 토지 중 한전(旱田)은 원장부(元帳付)가 1,772결, 시기결(時起結)이 821결이었고, 수전(水田)은 원장부(元帳付)가 3,433결, 시기결이 1,970결로 집계되었다. 호구는 20개 면을 통틀어 호수가 3,684호이고 인구는 1만 7449구였다. 군현 내 환곡은 총 3,617석이 있었다. 이 외에 훈련도감 포수보(砲手保), 병조 기병(騎兵)와 같은 중앙군과 감영 소속의 초관(哨官), 병영의 기패관(旗牌官) 등 지방군까지 각종 명목의 군역 대상자로 3,128명이 편성되어 있었다.
지역 내의 관영 시설은 먼저 교통 시설로 이인도(利仁道)에 속한 영유역(靈楡驛)이 있었고, 조선 전기까지 남원(南院)·고다진원(古多津院) 등이 남아 있어서 교통 거점으로 역할을 하였다. 교육 시설로는 향교가 있었으며, 1687년(숙종 13)에 세워진 칠산서원(七山書院)이 있었다. 칠산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다. 칠산서원 외에도 간곡서원(艮谷書院)이 있었는데 1859년(철종 10) 사액을 요청하였으나 받지 못하였다. 임천군 내 종교 시설로는 사직단과 여단·성황단이 있어서 지역 내 각종 제사를 실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변천]
임천군은 백제 때 가림군(加林郡)이었다. 통일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경덕왕 대인 757년 가림군(嘉林郡)으로 고쳤다. 고려 이후에는 성종 연간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고, 현종 때에는 가림현(嘉林縣)으로 고쳐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다. 충숙왕 때에는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던 아패해(阿孛海)의 아내 조씨(趙氏)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여 지림주사(知林州事)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 태조 연간인 1394년(태조 3)에는 명나라 환자(宦者) 진한룡(陳漢龍)의 요청으로 부(府)로 승격되었다가, 1401년(태종 1)에 환원되었다. 1403년(태종 3)에는 마찬가지로 명나라 환자(宦者) 주윤단(朱允端)이 요청하여 부(府)가 되었으나, 1404년 환원되었다. 지방 제도 개편이 이루어진 1413년(태종 13)부터는 군수(郡守)가 파견되는 임천군(林川郡)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 임천군이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