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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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集 |
영어공식명칭 | Kim Jip |
이칭/별칭 | 사강(士剛),신독재(愼獨齋),문경(文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 부여현감을 역임한 문신.
[가계]
김집(金集)[1574~1656]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호(金鎬)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이다. 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어머니는 조대건(曺大乾)의 딸 창녕 조씨(昌寧 曺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유홍(兪泓)의 딸 기계 유씨(杞溪 俞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이이(李珥)의 서녀(庶女) 덕수 이씨(德水 李氏)이다. 아들은 김익형(金益炯)·김익련(金益煉)이다. 형은 김은(金檃)이고, 동생은 김반(金槃)이다.
[활동 사항]
김집은 1574년(선조 7) 6월 6일에 태어나 159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직후 학행으로 6품직에 발탁되었다. 1623년 5월 부여현감에 제수되어 1627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김집은 부여현감으로 재임 시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軍政) 처리를 빈틈없이 하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경내가 안정되었고, 날마다 고을의 젊은이들과 온종일 글을 강독하였다. 후일 부여 지역민들이 송덕비를 세웠고, 서원을 세워 배향하였다.
김집은 이후 임피현령·전라도도사·선공감첨정·사헌부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자 합류하려고 하였으나 천안에서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1638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1639년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지냈으며, 1643년 원손보양관에 임명되어 원손 교육을 맡았다. 1644년 공조참의와 승정원좌부승지를 거쳐 1647년(인조 25) 세자시강원찬선 등을 지냈다. 1649년 이후 예조참판과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1652년(효종 3)에는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653년 의정부좌참찬, 1654년(효종 5)에는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김집은 1656년 5월 13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집의 저술로는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가 있고, 편저로는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묘소]
김집의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산36-3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집은 1659년 3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고, 1661년(현종 2) 6월 21일에는 효종의 배향공신으로 선정되었다. 돈암서원(遯巖書院)과 봉암서원(鳳巖書院), 창주서원(滄洲書院),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산서원(浮山書院),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883년(고종 20) 10월에는 문묘에 종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