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924
한자 朴容和
영어공식명칭 Bak Yonghw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12월 28일연표보기 - 박용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박용화 부여군 임천면에서 3·1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 - 박용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일 - 박용화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31일 - 박용화 고둥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징역 7월형 확정
몰년 시기/일시 1953년 9월 14일연표보기 - 박용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박용화 대통령 표창 수훈
출생지 팔충리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 지도보기
활동지 부여 - 충청남도 부여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용화(朴容和)[1881~1953]는 1881년 12월 28일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5일 팔충리 무쇠점마을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부여 지역 내 전·현직 천도교 간부였던 문재동(文載東)·황우경(黃宇京)·박성요(朴性堯)·황금채(黃金彩)·최용철(崔容澈)·정판동(鄭判同) 등과 함께 합숙하며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박용화 등은 3월 6일 새벽에 팔충리를 출발하여 오전 7시 무렵 임천면 구교리에 도착한 뒤 곳곳에 「독립선언서」를 붙이고 장터 등 인파가 많은 곳에서 3·1 운동의 정당성과 시위 동참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오전 10시 무렵 시위 군중이 불어나자 시위대를 이끌고 면사무소와 보통학교 등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임천 헌병출장소 앞에서도 만세 시위를 이어 가다가 박용화는 시위를 주도하였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박용화는 1919년 4월 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월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상고하였으나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용화는 1953년 9월 1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용화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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