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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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千炳萬 |
영어공식명칭 | Chun Byeongman |
이칭/별칭 | 천봉출(千鳳出)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4월 21일 - 천병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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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7년 2월 12일 - 천병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75년 5월 21일 - 천병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천병만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출생지 | 가증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독립촉성부여청년회 회장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천병만(千炳萬)[1910~1975]은 1910년 4월 21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에서 태어났으며, 천봉출(千鳳出)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조선의열단의 핵심 인물인 천병림(千炳林)의 동생이며, 천병림의 지령에 따라 조카 천경(千璟)과 천용구(千龍九), 김종대(金種大) 등 3명을 난징[南京]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보내 2기생으로 입교시켰다. 이후 고향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같은 마을 출신인 조선의열단원 강영직(姜永直)을 만나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천병만은 1937년 2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언도받았다. 출소 후 중앙일보 부여지국 기자 등으로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부여청년회 회장, 조선민족청년단과 대한청년단 간부, 부여면장, 치안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5년 5월 2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천병만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