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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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忠祠 |
영어공식명칭 | Samchung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10-3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인성 |
건립 시기/일시 | 1957년 - 삼충사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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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1년 - 삼충사 중건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삼충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삼충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변경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5월 17일 - 삼충사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지정 |
현 소재지 | 삼충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10-3 |
성격 | 사당 |
양식 | 겹처마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사당]|3칸[정문|묘문] |
측면 칸수 | 3칸[사당]|2칸[정문|묘문]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에 있는 백제 세 충신을 모신 사당.
[개설]
삼충사(三忠祠)는 백제의 3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그리고 계백(階伯)을 모신 사당이다. 656년(의자왕 16) 백제 좌평이었던 성충은 국가가 위태로움에 처하였음을 알고 의자왕에게 간언하다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죽음에 임박하자 당과 신라를 막을 수 있는 방책을 의자왕에게 바쳤으나 의자왕은 성충의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에 이르자 성충의 방책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
660년(의자왕 20)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의자왕은 고마미지현에 귀양 가 있던 흥수에게 방어책을 물었다. 흥수가 방어책을 내었으나 또다시 흥수의 방어책을 채택하지 않아 결국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다. 계백은 백제 말의 장군으로 관등은 달솔이다. 전장에 나서기 전 처자식을 죽여 결사 항전의 뜻을 보여 준 계백은 오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나아가 신라군과 4번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3충신은 후대에 충절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삼충사는 1984월 5일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바뀌었다.
[위치]
삼충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10-3번지 부소산의 동남쪽 중하단부에 있다.
[변천]
3충신의 위패는 본래 고려 시대 이존오, 조선 시대 인물 정택뢰, 황일호와 함께 부여 청마산성 안에 있던 의열사(義烈祠)에 봉안되어 있었다. 1871년(고종 8) 의열사가 훼철되면서 삼충신의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였다. 1957년 지방 유지들이 삼충사를 건립하고 3충신의 위패를 모셨다.
[형태]
삼충사는 사당, 정문 그리고 묘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의열문(義烈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묘문에는 ‘충의문(忠義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묘문인 충의문의 건축 규모, 양식은 의열문과 같다.
[현황]
삼충사에서는 매년 10월 백제문화제 때 제향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삼충사는 충절의 표상인 백제 3충신을 모신 사당으로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