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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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川 嘉林藪 |
영어공식명칭 | Imcheon Forest|Imcheon Garimsu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지명/군락, 서식지 및 철새 도래지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7년 12월 28일 - 임천 가림수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95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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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현 장소 | 임천 가림수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12-1번지 |
생물학적 분류 | 왕버들 |
개체수 | 7그루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에 있는 조선 전기에 마을의 허한 곳을 보완하고자 조성한 숲.
[개설]
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는 조선 시대 충청도 임천 고을의 행정기관이 있던 곳이다. 임천 가림수(林川 嘉林藪)는 조선 전기에 고을을 설치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시대에 읍치(邑治)의 결함을 보완하려고 숲을 조성한 읍치비보(邑治裨補)의 전형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12월 28일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95호로 지정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전기 임천의 소재지였던 군사리는 고을의 진산(鎭山)인 성흥산을 등지고 남쪽에 읍치가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쪽과 동쪽은 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외부의 침입에는 더없이 견고한 요새를 이루지만, 곡창 지대인 남쪽은 넓은 들판이 금강과 연결되어 빈틈이 있어 보였다. 이러한 빈틈을 보완하는 풍수적인 조치로 탁 트인 공간에 나무를 심어서 숲을 가꾼 것이 바로 임천 가림수의 기원이다. 따라서 임천 가림수는 적어도 6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읍치비보 및 비보풍수(裨補風水)의 본보기이다.
임천 가림수는 17세기 초까지도 건강한 숲의 생태를 유지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민구(李敏九)가 1626년(인조 4) 임천군수로 있을 때 “넓은 땅의 가림수/ 날이 개이니 나무 등성이 덩그러니…”라고 지은 시에서 임천 가림수의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숲이 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마을이나 고을별로 숲에 대한 엄격한 금기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비보에 해당하는 임수(林藪) 안에서 나무를 끊거나 농경을 하는 사람은 장(杖) 80대, 그리고 얻은 것은 되돌려받고 해당 수령의 관직을 몰(沒)한다”라고 하였다. ‘임수’는 특수한 기능을 지닌 나무와 풀이 자라는 곳으로,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숲을 일컫는다. 충청도의 임수로는 임천 가림수와 더불어 청안[현 괴산군 청안면]의 읍수(邑藪), 금산[현 금산군]의 동림(東林), 청주[현 청주시]의 북수(北藪)·남수(南藪) 등이 있다.
이후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가림수의 생태 환경은 크게 변모하였는데, 주변의 저습지에 경작지를 개간하면서 숲의 면적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군의 남쪽 1리에 가림수가 있는데, 군수 김재구(金載九)가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재구의 재임 기간이 1784년(정조 8)에서 1787년(정조 11) 사이인 점을 고려하면 저습지에 잘 자라는 왕버들을 심어서 훼손된 숲의 일부를 복원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현황]
현재 군사리 도로변에 서 있는 임천 가림수는 수령 270년 내외로 추정되는 왕버들이다. 일제 강점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35그루의 왕버들이 옛 읍에서 남쪽의 논산-서천을 잇는 도로변 400m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성하였던 왕버들은 대부분 논으로 개간되어 사라지고 현재 7그루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