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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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호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큰 은단지골 작은 은단지골」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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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지 | 갈산리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갈산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농부|형제 |
모티프 유형 | 근면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에서 큰 은단지골과 작은 은단지골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
[개설]
「큰 은단지골 작은 은단지골」은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에서 아버지가 물려준 은단지를 찾아 헤맨 형제와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2년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되어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갈산리에서 마을 주민이 구술한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내용]
옛날에 한 농부 부부와 아들 둘이 살고 있었다. 농부의 가족은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고향을 떠나 성주산(聖住山)을 넘어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갈산리 부근에서 산막을 지어 머물렀다. 산막 인근의 들판에는 피가 많이 자라서 배고픈 중에 양식으로 삼기 좋았다. 농부의 아내는 들판의 피를 훑어 양식으로 삼았고, 농부는 들을 개간하여 논밭을 만들었다. 노력 끝에 그해 가을 열심히 추수를 하여 2년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농부 부부는 산막을 고쳐 집을 지었는데, 어느 겨울날 지나가던 도승이 집에 들렀다. 도승은 여름옷을 입고 있어 매우 추워하였다. 그래서 농부는 자신이 입은 겨울옷을 시주 삼아 갈아입도록 권하고는 저녁까지 차려 대접을 하였다. 도승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차려 준 음식을 먹었다. 그러고는 농부가 터를 잡은 곳의 지형이 부자가 되기는 어렵지만 열심히 일하면 굶지는 않을 것이라 말하였다. 도승은 앞으로 농부의 집 앞에 마을이 생길 것이라 예언하고는 주변 이곳저곳의 이름을 정하여 주었다.
도승이 말한 대로 열심히 일하는 만큼 곡식은 차곡차곡 쌓여 갔다. 농부는 쉬지 않고 들판을 개간하였다. 세월이 흐르자 농부에게는 많은 전답이 생겼고, 곳간도 가득 찼다. 그런데 부지런한 농부와 달리 농부의 두 아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두 아들이 매우 게을러 농부가 몇 번을 혼내기도 하였으나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농부가 죽을 때가 되어 유언으로 항상 부지런히 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산에 은단지 셋을 묻어 두었으니 은단지를 찾아 숨겨 둔 보물을 가지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형제는 부지런히 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다음 날부터 은단지를 찾는 데에만 시간을 썼다. 형제는 매우 욕심이 많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은단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땅을 여기저기 파도 은단지는 나오지 않았다. 1년 넘게 산을 팠으나 은단지가 나오지 않았다. 겨울에는 땅을 파기 어려워 땅 파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은단지는 애초에 없었으며 자신들의 게으름을 알던 아버지가 부지런히 살라고 남긴 유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제는 그제야 불효를 뉘우쳤고, 이후로는 열심히 일을 하여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사람들은 큰아들이 은단지를 찾아 헤매던 곳을 ‘큰 은단지골’, 동생이 은단지를 찾아 헤매던 곳을 ‘작은 은단지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큰 은단지골 작은 은단지골」의 주요 모티프는 ‘부지런함에 대한 보상’, 혹은 ‘게으름에 대한 경계’이다. 큰 부자가 될 수 없는 운명임에도 부지런함으로 부자가 된 농부와 게으른 자식들에게 부지런함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여 준 일화를 담고 있어 근면이라는 덕목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