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괭이 방죽」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1493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맹괭이 방죽」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
관련 지명 맹괭이 방죽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지도보기
채록지 구교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전설
주요 등장 인물 이만광|좌평|몸종
모티프 유형 역사 인물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일대에서 맹괭이 방죽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

[개설]

「맹괭이 방죽」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일대에서 맹괭이 방죽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이다. 이만광이라는 점쟁이가 소정방에게 의자왕(義慈王)이 있는 곳을 발설한 뒤로 독사에 물려 죽고, 집에도 물이 차 방죽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채록/수집 상황]

「맹괭이 방죽」은 1992년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되어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에서 마을 주민이 구술한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채록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내용]

옛날 백제 의자왕 대 부여로 들어서는 초입에 이만광이라는 점쟁이가 살고 있었다. 이만광은 매우 용하여 신라나 고구려에서도 사람들이 몰래 찾아와 점을 치고 갈 정도였으므로, 점을 치며 받는 복채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다. 어느 날 이만광의 소문을 들은 좌평 한 사람이 이만광의 집을 찾아갔다. 좌평이 집 앞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이만광이 누가 함부로 화를 짊어지고 오냐면서 물러가라 외쳤다. 이만광이 계속하여서 화를 내며 창피를 주기에 좌평이 그대로 집에 돌아왔다. 좌평은 괘씸하게 생각하여 몸종을 이만광의 집에 보내어 보았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점쟁이가 나오면서 한 달도 못 되어 몸 가죽을 벗을 놈이 어디를 들어오느냐고 화를 내므로, 몸종 역시 그대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한 달이 되지 않아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와 부여는 함락되고 의자왕은 계룡산(鷄龍山)으로 도망가 버렸다.

당나라 소정방이 의자왕을 찾을 길이 없어 유명한 점쟁이라고 소문이 난 이만광을 불러들였다. 소정방은 의자왕이 숨은 곳을 찾아 주면 큰 벼슬을 주겠다 하였다. 하지만 이만광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그러자 소정방은 죽을 때까지 곤장을 치게 하였다. 결국 이만광은 매에 못 이겨 의자왕이 숨은 곳을 일러 주었다. 의자왕은 이만광이 알려 준 곳에서 잡혀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후 이만광에게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집에 밤마다 돌멩이가 날아들고 지붕의 기왓장이 깨졌다. 하루는 허술한 사내가 구걸을 와서 줄 것이 없다고 내쫓았는데, 그날 밤에 집에서 몇백 마리의 뱀이 꿈틀거렸다. 이튿날 다른 허술한 사내가 구걸을 왔기에 다시 화를 내어 쫓았는데, 그날 밤에는 집에 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계속하여 집에 물이 고이자 결국 이만광은 마루로 나오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독사에 물려 죽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물이 계속 고여 결국에는 지붕 위까지 물이 차므로 여기에 방죽이 생기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만광을 찾아온 거지는 좌평과 몸종이었다. 비록 백제가 화를 입어 망하게 되었으나 임금을 붙잡히게 한 데에 대한 복수였던 것이다. 이후 방죽은 ‘잘났다고 아는 척하는 만광이네’라 하여 ‘맹괭이 방죽’이라 불리었다.

[모티프 분석]

「맹괭이 방죽」에 등장하는 백제의 성이 함락되고 왕이 도피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모티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만 임금의 행방을 알지 못하여 소정방이 애를 태웠다는 데서 백제의 패망을 거부하려는 민중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입을 열지 않으려는 이만광의 태도에서 민중 의식의 반영이 희망적으로 지속되다가 결국 좌절되고, 이후 이만광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혹독한 보복 행위를 통하여 민중 의식이 극단화되어 폭발한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무의식에는 외세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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