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고려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83
한자 高麗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Goryeo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106년 - 고려시대 혜성군과 당진현에 감무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93년 - 고려시대 혜성군이 면주로 승격

[정의]

고려시대 충청남도 당진 지역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려시대 성종은 전국을 12목으로 나누어 관리하였는데, 이 때 당진 지역은 홍주목 관할이었다. 통일신라 때부터 사용했던 혜성군[현 면천면]과 당진현, 신평현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려는 1018년(현종 9)에 행정 구역을 5도 양계로 개편했고, 당진 지역은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정세의 변동과 인물의 등장에 따라 당진 지역의 행정적 위치가 요동치기도 했다. 즉, 1106년(예종 1)에는 혜성군과 당진현에 감무를 두었다는 사실이 있고, 신평현은 현종 9년 이후 운주[홍주, 현 홍성]의 속현이 되었으며, 충렬왕 19년(1293)에는 혜성군의 복규(卜奎)가 합단군(哈丹軍)을 막은 공이 있어 혜성군을 면주(沔州)로 승격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전체적으로 볼 때, 당진 지역은 운주의 속군과 속현에 해당되었다. 즉 홍주는 혜성군[현 당진시]·대흥군·결성군의 3군과 고구현·보령현·여양현·청양현·신평현[현 당진시 신평면]·덕풍현·이산현·당진현[현 당진시]·여미현[현 당진시 정미면]·여양현·정해현[현 당진시 정미면 일부]의 11개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던 것이다. 결국 중세 사회의 당진 지역은 작은 단위로 분할되어 있어서 통일성을 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대 사회부터 형성된 자연 마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 풍습과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중세 사회에서는 향·소·부곡을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설치하여 운영했다. 향·소·부곡민은 양민이면서도 군현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의 주민으로서 차별을 받았다. 이들은 일반 군현의 주민보다 세금 부담이 과중했고 거주 이전도 소속 집단 내로 제한되는 등 타지로의 이주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향이나 부곡에 거주하는 주민은 농업을, 소에 거주하는 주민은 수공업이나 광업품의 생산을 주된 생업으로 했다.

조선 시대 성종 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전국의 향·소·부곡은 모두 785개이며 충청남도에 속한 것은 46개이다. 이를 세분하면 향이 15개, 소가 40개, 부곡이 41개이다. 그 밖에 처(處)가 2개소나 있는데 당진 지역에는 향은 없고, 부곡은 5개, 소가 2개 있었다. 염솔부곡(廉率部曲), 염정부곡(塩貞部曲), 온월부곡(溫月部曲), 가리저부곡(加里渚部曲), 합덕부곡(合德部曲), 명해소(明海所), 도촌소(桃村所) 등이 있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홍주목 고적 조에 의하면 합덕폐현(合德廢縣)은 “본래 덕풍현(德豊縣) 소속으로 부곡이 되었다. 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황석량(黃石良)이 원의 조정에 들어가 총애를 받은 바 있어 현이 되었고 뒤에 본주에 소속되었다.”라고도 했다. 이와 같이 고려 사회에서는 일반 군현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에는 집단적으로 처벌하여 군현을 부곡이나 향, 소 등으로 강등했지만 반대로 이들이 국가적인 공을 세웠을 경우에는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결국 고려 시대 당진 지역 내 여러 곳에 설치되었던 향·소·부곡은 고려 말부터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모두 폐지되어 현으로 승격되었다.

당진 지역과 관련된 고려 사회의 내용으로 최충과 관련된 것이 주목을 받고 있다. 최충(崔沖)[984~1068]은 해주 최씨의 대표적 인물로 최충의 후손들이 송산면 무수리유곡리에 동족 마을을 형성하며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최충을 기리기 위해 최충의 영정을 모시고 입향했으며 면천 영당(沔川影堂)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다. 이들의 입향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면천 영당이 1535년(선조 8)에 세워졌음을 고려할 때 16세기경으로 여겨지고, 면천 영당이 해동 영당(海東影堂)으로 개칭된 것은 1981년이다. 최충의 영정을 봉안하고 최충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고자 하는 해주 최씨 문중의 노력은 한국 중세 사회인 고려시대와 당진 지역 주민을 한층 더 긴밀하게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민중 생활]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에는 고려시대 민중 생활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매향(埋香) 암각이 있어 주목된다. 고려시대 농민들은 국가 신앙인 불교에 심취되어 있었고, 불교에 바탕을 두면서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을 전개하기 위한 공동체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신앙 조직이 향도(香徒)였다. 향도는 향을 피우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삼국 시대부터 있었다. 특히 김유신이 만든 화랑도를 일컫는 용화 향도(龍華香徒)가 유명했는데, 미륵불이 용화수에 내려와 세상을 구원한다는 믿음에서 생겼다고 전한다.

향도는 주로 절에서 모였는데, 일종의 신도 모임과 비슷했다. 향도에 모인 사람들은 부처나 종, 탑, 절을 만드는 일을 직접 하거나 이에 필요한 경제적 힘을 분담했다. 또 믿음을 위한 법회나 보시는 물론이고 매향을 하기도 했다. 매향은 죽은 뒤의 복을 빌거나 후손에게 전승키 위해 산곡수와 해수가 만나는 곳에 향을 묻는 일을 말한다. 향은 오랫동안 땅에 묻어두면 단단해지고 굳어져 물에 넣으면 가라앉기 때문에 침향(沈香)이라 했다. 침향은 불가에서 향중의 으뜸으로 삼았고, 침향의 향연을 맡고 향물을 바르면 온몸이 청정해지고 무량의 공덕을 얻는다고 믿었다. 결국 정미면 수당리 주민들은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자신들이 윤회하여 환생하거나, 후손들이 향나무를 건저 올려 미륵 앞에 향연을 피울 것을 기원했다. 그리고 이들은 매향을 하고 난 후, 자신과 후손의 발복을 위해 이를 기념하면서 매향의 위치를 큰 돌에 새겨 미래의 사람들에게 알렸다. .

매향 암각은 삼존 불상 뒤편의 속칭 ‘배바위’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현재 암반의 마모가 심하여 전체 비문의 형적을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우나 대부분의 글자는 판독되었다. 바위의 동편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바위 동편의 글은 마모가 극히 심하여 글씨 전체를 판독할 수 없다. 부분적인 글자를 통해 목공 전설 혹은 매향 암각으로 추정된다. 매향 암각은 돌을 다듬어 세운 것도 있고, 자연석에 그대로 암각한 것도 있다.

매향 암각의 내용은 “庚午二月 日 余美北天口 浦東際埋香 一丘化主兗先 結○香徒(경오이월 일 여미북천구 포동제매향 일구화주연선 결○향도)[경오는 이월 일 여미 북쪽 천구포 동쪽가에 매향하였다. 비구 화주 연선과 결○ 향도이다]”이다. ‘庚午’년은 1270년(원종 11), 1330년(충혜왕 1), 1390년(공양왕 2), 1450년(세종 32) 중 하나에 해당될 수 있다. 그리고 내용 중에 보이는 ‘여미(余美)’는 여미현을 말하는 것으로 여미현과 정해현이 합해서 해미현이 되기 이전, 즉 1407년(태종 7) 이전에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중국 연호가 아닌 ‘경오년’으로 썼다는 점에서 원나라 초기인 127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천구포’는 현재의 천의포로 여겨진다. 천의포의 구티 마을에서 발견된 침향은 현재 기지시 줄다리기 박물관에서 보관 하고 있다.

오른쪽에 새겨진 암각은 “庚戌十月 日 鹽率西村出由 木工合埋口(경술십월 일 염솔서촌출유 목공합매구)”로 읽혀져 왔다. 내용 중 ‘출유’는 ‘出浦’로 매향을 한 장소, ‘목공합매구’는 ‘목향매치(木香埋置)’ 또는 ‘목향매구(木香埋口)’로 읽어 역시 매향 관련 암각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염솔’은 봉화산 서쪽의 마을을 지칭한다. 결국 이 내용은 배바위에 관한 목공 전설이라기보다 매향 관련 기록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의 유적 유물]

배 바위 앞에는 보물 제100호인 안국사지 석조 여래 삼존 입상과 보물 제101호인 안국사지 석탑이 서 있다. 높이는 본존불이 580㎝, 좌협시불[서편] 322.6㎝, 우협시불[동편] 292㎝ 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과 신체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신체는 대형이지만 인체의 조형성이 부족하여 네모난 기둥 같은 느낌을 주고 있고, 얼굴은 신체에 비해 어색하게 큰 비례를 보이고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넓적한 얼굴 모습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머리 위에 쓴 원통형의 관 위에는 사각형의 보개(寶蓋)[천개(天蓋)]가 얹혀 있으나 너무 커서 매우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보개는 고인돌의 뚜껑돌과 같은 말 그대로 ‘보물 뚜껑- 하늘 뚜껑’이다. 눈과 비가 석불에 직접 맞는 것을 막기 위해 모자처럼 불상 머리 위에 얹은 것이다. 야외에 세워진 고려 불상의 중요한 양식이기도 하다.

삼존불이 있는 안국사의 창건 연대나 창건자에 대한 기록도 없다. 백제 말에 창건되었고, 한때는 수백 명이 수도하던 큰 절이었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 다만 석불 입상과 석탑의 양식, 이곳에서 출토되었다는 작은 금동 불상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에 번성했던 사찰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0 해미현 조에 보면 “안국산이 해미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안국사안국산에 있다.”고 함으로써 이 책이 펴내진 1531년 무렵까지는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34년에 펴낸 『청구도』에도 안국사의 명칭이 기록된 것을 보면 19세기까지도 안국사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정식 사찰은 없다.

안국사와 석불, 석탑을 통해 정미면 수당리에 고려시대의 강력한 지방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미의식보다는 장대한 규모의 석불과 석탑을 조성함으로써, 시주와 발원하는 자신의 강대함을 간접적으로 인근 지역에 과시했다. 이들은 부처의 위상을 빌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석불 규모의 위엄을 통해 민중에 대한 통제력을 강제했다. 이렇게 조성된 불상의 모습은 자비로움과는 대조적으로 거칠고 근엄했다.

당진의 지방 세력은 불상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고자 노력했다. 반면 미륵불을 기다리는 주민들의 꿈은 지난한 삶의 어려움 속에서 더욱 확산되었다. 문제는 미륵불을 염원하는 향도의 조직도 지방 세력의 지휘와 통제 하에 움직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방 세력으로서의 세도와 지위를 계승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민중에 비길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민중의 꿈은 기원과 염원을 통해 정신적으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 대중화 된 불교가 민중의 꿈을 대신하고 있었다. 향도 조직과 함께 매향을 하면서 수당리 주민들은 자신의 미륵을 창조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발원과 후손의 발복(發福)을 기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안국사와 석불, 석탑은 당진 지역 주민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유물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