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합덕농민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93
한자 合德農民抗爭
영어공식명칭 Hapdeok Farmers Uprisi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월 20일연표보기 - 합덕농민항쟁 시작
종결 시기/일시 1894년 1월 20일 - 합덕농민항쟁 종결
발생|시작 장소 합덕농민항쟁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합덕농민항쟁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정의]

1894년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서 발발한 농민 항쟁.

[개설]

합덕농민항쟁은 1894년 1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정규(李廷珪)의 탐학에 대항하여 발발한 합덕제 주변 6개리 농민의 항쟁이다. 이들은 이정규의 악행을 정리한 『혈원록(血怨錄)』을 작성하여 관할 관청인 홍주 목사에게 제출하며 선처를 호소하였으나, 오히려 이정규는 이들을 살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이정규를 체포하여 죄상을 적시하고, 자택을 불태웠다. 주도자들은 후일 동학 농민 전쟁에 참여하여, 합덕농민항쟁은 동학 농민군의 합덕 전투로 계승되었다.

[역사적 배경]

1894년은 민씨 정권을 둘러싼 외척 세도 정치의 부정부패가 극심했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농촌을 중심으로 가속화되면서 미곡 수탈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합덕 지역 농민들도 이와 같은 대내외 정세 속에서 극도로 피폐하였고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이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정규가 덕산군 비방곶면 창리[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에 낙향하여 대지주로서 각종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정규의 악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농민들을 위협하여 재산을 뺏고, 자신의 주택 인근의 ‘연제지’라는 저수지에 있는 연근을 채취하기 위해 수시로 농민을 동원했다. 둘째,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동네 웅덩이를 퍼내면 이정규가 나타나 고기를 모두 빼앗아갔다. 셋째, 이정규가 낚시를 하면서 농민을 위협하여 자신의 노비와 혼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거절하면 족보를 빼앗아 물속에 던졌다. 넷째, 이정규에게 재산을 빼앗긴 농민이 찾아와 애원하자 합덕제에 익사시켰다. 그 외에 주민들에게 수탈한 금전이 모두 37,000냥이 넘었고 다른 것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경과]

이정규의 횡포와 전횡에 격분한 6개 마을 농민들은 1894년 1월 20일[음력 1893년 12월 14일], 합덕 방죽 서쪽에 있던 ‘도랑댕이’라는 산기슭에 모여 대책을 협의했다. 그 결과 홍주 목사에게 호소하기로 결의했다. 대표로 선정된 나성로(羅聖魯)와 이영탁(李永鐸)은 이정규의 악행을 열거한 『혈원록』을 써서 주민 800여 명과 함께 홍주로 달려가 홍주 목사에게 탄원하였다.

한편 이정규는 농민들이 홍주에 간 사실을 알고 크게 분개했다. 이정규는 홍주 목사에서 편지를 보내 홍주에 간 농민 전원을 살해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 편지가 귀향하던 농민들에게 발각되었다. 격분한 농민들은 다시 합덕 방죽에 모여 최후의 수단을 행동으로 보여 주기로 결의하였다.

농민들은 이날 밤, 전체 주민을 소집하였다. 수천 명에 달한 농민들은 곧바로 이정규의 집을 포위하고 이정규를 소환하였다. 그리고 이정규에게 농민에 대한 가렴주구와 합덕 방죽의 개간, 가혹한 수세 부과의 부당성, 홍주목에 등장하러 간 농민들을 살해하라고 한 연유를 따졌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부인하던 이정규가 마침내 농민들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급변하는 이정규의 태도를 불쾌히 생각한 농민들은 이정규의 집과 이정규의 형제와 친지, 하인배의 집 10여 호를 불태웠다. 이에 이정규는 아버지의 위패만 챙겨 가족과 함께 도주하였다.

[결과]

항쟁을 주도한 나성로와 이영탁을 비롯한 6개 동리 800여 명의 주민들은 1894년 2월에 다시 홍주목에 가서 이 사건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했고, 아무런 결과가 없자 또다시 상급 관청인 공주 감영으로 가서 관찰사 조병호(趙秉鎬)에게 진정했다. 그 후 의금부에서 이정규에게 2년간 유배형을 내렸고, 농민 대표인 나성로에게도 함경도 이원현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주모자인 방재성(方栽星)과 김윤필(金允弼) 등도 엄형에 처했다. 또한 덕산 군수로 하여금 합덕 주민들을 위무(慰撫)토록 조치했다.

[의의와 평가]

합덕농민항쟁은 이정규의 탐학에 대항하여 발발한 항쟁이었지만, 발발 배경과 과정을 살펴볼 때 19세기 후반기 농민 봉기 중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고자 한 농민 항쟁이었다. 또한 합덕농민항쟁은 시기적으로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직전에 발발하여 동학 농민 혁명의 서막을 여는 전사(前史)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합덕농민항쟁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이 같은 해에 일어나는 합덕 지역 동학 농민 혁명의 주동 인물이 됨으로써 합덕농민항쟁이 동학 농민 혁명으로 계승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5.21 [정의] 오타 수정 1984년->1894년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