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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485
한자 李宜茂墓-神道碑
영어공식명칭 Yi Uimu of Graveyard and Memorial Ston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능안길 143-26[도문리 산78-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학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49년 - 이의무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07년 - 이의무 사망
조성 시기/일시 1540년 - 이의무 신도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9년 12월 29일 - 이의무 신도비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1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0년 12월 30일연표보기 - 이의무의 묘 및 신도비로 개칭되어 충청남도 기념물 제185호로 재지정
현 소재지 이의무 묘 및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능안길 143-26[도문리 산78-1]지도보기
성격 묘소|묘비
관련 인물 이의무
봉분 크기/묘역 면적 약 18m[묘 둘레]|2m[봉분 높이]|약 3m[용미(龍尾) 길이]|약 30m[곡장]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185호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능안길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이의무의 묘와 신도비.

[위치]

이의무 묘 및 신도비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능안길 143-26[도문리 산78-1] 덕수 이씨 묘역 안에 있다.

[역사적 관련성]

이의무(李宜茂)[1449~1507]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형지(馨之), 호는 연헌(連軒)이다. 지돈령 부사(知敦寧府事) 이명신(李明晨)의 손자이고, 이추(李抽)의 아들이다. 1467년(세조 13) 사마시를 거쳐 1477년(성종 8) 문과에 급제하였다. 연산군 초 사간(司諫)·집의(執義)·상의원 정(尙衣院正)을 지내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어천역(魚川驛)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502년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외직을 청하여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는데, 공세미 납부를 기한 내에 조정에 바치지 않아 한때 투옥(投獄)되기도 하였다. 덕수 이씨가 면천에 세거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이의무는 면천의 수려함에 감탄하여 낙향지로 뜻을 두었고 유언에 따라 창택리 봉화산[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백주봉 능안에 장례하였다고 전한다. 이의무는 시문에 능했으며, 문집으로는 『연헌잡고』를 남겼고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다.

[변천]

이의무 신도비는 중간에 마모되어 1851년에 12세손 이필신이 지금의 농대석으로 바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농대석은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이의무 묘역의 규모는 둘레 약 18m, 높이 2m, 용미(龍尾)[무덤의 분상 뒤를 용의 꼬리처럼 만든 자리]는 약 3m, 곡장(曲牆)[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은 약 30m이다.

신도비는 가로 153㎝, 세로 90㎝, 높이 57㎝의 화강석 농대석에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을 올렸다. 이수(螭首)[비석의 머리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와 비신이 한개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너비는 90㎝, 두께는 27㎝, 이수를 포함한 비신의 높이는 270㎝이고 순수한 비신 부분의 높이는 197㎝이다. 바로 옆에는 가로 286㎝, 세로 190㎝, 높이 70㎝ 크기의 화강석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가 놓여 있는데, 이것이 원래 신도비의 귀부이다.

[금석문]

이의무 신도비 전면에 '증 영의정 이공 신도비명'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이의무 묘 및 신도비덕수 이씨 가문의 묘역에 있다. 13기의 묘소 중심에 있는 것이 이의무의 묘소이다. 부부의 무덤이 나란하게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역은 계체석(階砌石)[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이 없이 계절(階節)[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과 배계절(拜階節)[절하기 위하여 무덤 앞에 계절(階節)보다 한 층 낮추어 평평하게 만든 땅]로 나뉘었으며 계절에는 상석이 있고, 배계절에는 새로 만든 비석과 동자상 1쌍, 신도비와 거북 받침돌 비석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이의무 묘 및 신도비는 충청남도 내에 있는 분묘로, 곡장을 두른 묘는 매우 희소하며 대체로 원형이 잘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