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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93
한자 道門里德水李氏世居地
영어공식명칭 Ancestral Village of Deogsu Yi Clan in Domun-ri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남석

[정의]

충남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성씨.

[개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연헌(蓮軒) 이의무(李宜茂)[1449~1507]가 홍주 목사로 부임하여 조선 시대 목장이 있었던 송산면을 순회하다가 ‘능안’ 마을을 명당이라 지정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이 이곳에 이의무의 묘를 조성하였다. 입향조인 이행(李荇)[1478~1534]은 이의무의 아들이었다. 이행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좌의정을 지냈다. 이행은 이곳에 들어온 이후 회화나무를 심으며 은둔 생활을 하였는데, 후손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가세를 확장시켜 20대 500여 년의 연륜을 간직하게 되었다.

[명칭 유래]

덕수이씨 세거지가 형성된 곳은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능안 마을이다. 먼저 ‘도문리(道門里)’라는 지명은 ‘도문 잔치’에서 나왔다고 한다. 또한 ‘도문골’, ‘도문(道門)’이라 하였다. 실제로 이의무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에 오름으로 ‘5도문(五道門)’이라 부른다. 또한 ‘도문 잔치’는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잔치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능안 마을의 ‘능안’이라는 명칭은 "능(陵) 자리가 아니다."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 면천의 창택[삼월리, 도문리]에는 귀한 명당이 있다고 알려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국사를 파견하여 명당을 조사하였다. 국사는 송산면 도문리에 와서 지세를 살폈다. 하지만 이곳은 명당이긴 하나 왕릉으로 쓰기에는 부족하다고 결론지었고, ‘능안’은 이때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능안에 대한 다른 주장도 있다. 이들은 ‘능안’을 ‘능내(陵內)’로 해석한다. 조선 시대 정승을 지낸 인물의 묘소는 자못 웅장하고 각종 석물과 신도비를 세우게 된다.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이 볼 때, 정승을 지낸 집안의 묘소들이 늘어서 있는 이곳을 경이롭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왕릉에 견주어 바라보게 되었고, 능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능안’으로 했다는 설명이다.

[형성 및 변천]

덕수이씨는 고려 후기인 13세기, 무인 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에 활동한 이돈수(李敦守)에서 시작된다. 1218년(고종 5) 거란이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에 이돈수는 중랑장으로 있으면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관향을 덕수로 한 것은 이돈수가 경기도 덕수현[현재 황해도 개풍군] 덕수리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덕수이씨는 우리나라 역사상 위대한 위인인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와 이순신(李舜臣)[1545~1598], 그리고 조선 시대 중기의 이행(李荇), 이기(李芑), 이안눌(李安訥), 이식(李植), 이단하(李端夏)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전체적으로는 100여 명의 문과 급제자와 7명의 정승, 6명의 대제학, 4명의 공신을 냈다.

당진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덕수이씨는 10세조 이의무(李宜茂)에 이르러 그 연원이 형성되었다. 이의무가 1504년(연산군 10) 홍주 목사로 부임하였을 때 관내 말 목장이 있던 현재의 유곡리, 버드나무골 부근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리고 “생오노어사(生吾老於斯) 사오장어사(死吾葬於斯)하리로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의무가 사망한 뒤에 자손들은 이의무를 명당이라고 알려진 송산면 도문리 장자동 능안에 장례를 모셨다.

이의무에게는 슬하에 5남 2녀가 있었다. 첫째 아들인 이권(李菤)[1467~?]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둘째가 이기(李芑)[1476~1553]로 영의정, 셋째 이행(李荇)[1478~1534]은 좌의정을 지냈다. 넷째 이영(李苓)[1481~1546]은 평해 군수를, 다섯째 이미(李薇)[1484~?]는 예조 판서와 한성 판윤을 지냈다. 5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에 오름으로 ‘5도문(五道門)’이라 부른다.

송산면에 낙향한 것은 용재(容齋) 이행(李荇)이다. 이행은 38세인 1517년(중종 12)에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로 신진 사류들과 충돌을 빚게 되자 송산면 삼월리 창택 마을에 낙향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자호를 ‘창택어수(滄澤漁叟)’라 짓고 이곳에 한거(閑居)하였다. 이행은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현재 당진군 천연 기념물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이행의 후손들은 이곳에서 터전을 일구고 가세를 확장시켰다.

송산면에 거주하는 덕수 이씨 문중은 춘당공파 중의 용재공종파라고 부른다. ‘춘당공(春塘公)’은 고려 공민왕 때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된 6세 이인범(李仁範)의 아들인 이양(李揚)을 지칭한다. 이양의 호가 춘당이었고 조선 초기에 공조 참의를 지냈다. ‘용재(容齋)’는 춘당공의 후손인 11세 이행의 호이며 이행의 장남인 12세 이원정의 직계 후손들을 용재공종파라고 한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도 이곳 덕수이씨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안눌이행의 증손으로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추증한 공으로 정미면 사관리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다. 이 때문에 묘소와 신도비가 사관리에 있다. 이안눌의 장손은 6대를 내리 문과 급제를 하였다. 1706년 동악 이안눌을 배향한 동악 서원이 송산면 명산리[서원머리]에 세워지면서 덕수이씨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당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동악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에 의하여 폐쇄되고 말았다.

근현대의 인물로는 이종혁(李種赫)[1892~1935]이 있다. 이종혁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였으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독립 투쟁에 헌신하였다. 특히 1923년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인 참의부(參議部)의 군사 위원장과 집행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마덕창(馬德昌)이란 가명으로 치열한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그 외에 목천 현감을 지낸 21세손 이덕희(李德熙)가 있고, 27세손 이재인(李載仁)은 성균관 전의, 면의회 의장, 당진 향교 전의를 지냈으며, 27세손 이재서(李載瑞)는 부여 군수와 성균관장을 지냈다.

[자연환경]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능안 마을창택산 북쪽에 있다. 창택산은 해발 104m의 작은 산이다. 하지만 주변이 구릉지로 형성되어 창택산이 가장 높은 산이 되었다. 조선 시대 면천군의 봉수가 설치되었던 산이다. 이 산의 북쪽 구릉지가 능안인데 창택산 능선이 능안을 감싸 안고 있다. 동남쪽으로 트여 있는 형세다.

[현황]

2016년 현재 덕수이씨송산면 삼월리에 10여 호, 도문리에 15호, 상거리에 2호 등 30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또한 송악면 정곡리에도 10여 호가 거주하고 있고 기타는 복운리, 금곡리, 석포리, 중흥리, 신평 지역에도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시향이의무를 중심으로 음력 10월 10일부터 시작하여 10월 15일까지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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