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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60
한자 德水李氏
영어공식명칭 Deoksu Yisi|Deoksu Yi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덕수(德水) - 황해도 개풍
입향지 덕수이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덕수이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묘소|세장지 덕수이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산78-1 지도보기
성씨 시조 이돈수(李敦守)
입향 시조 이행(李荇)

[정의]

이돈수가 시조이고 이행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연헌(蓮軒) 이의무(李宜茂)[1449~1507]가 홍주 목사로 부임하여 조선 시대 목장이 있었던 송산면을 순회하다가 능안 마을을 명당이라 눈여겨봐 두었다. 그 후 자손들이 능안 마을이의무의 묘를 조성하였다. 입향조인 이행(李荇)[1478~1534]은 이의무의 아들이며, 좌의정을 지냈다. 이행송산면 도문리에 입향한 이후 회화나무를 심으며 은둔 생활을 하였는데, 후손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가세를 확장시켜 500여 년의 연륜을 간직하게 되었다.

[연원]

덕수이씨(德水李氏)는 고려 후기인 13세기, 무인 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에 활동한 이돈수(李敦守)에서 시작된다. 1218년(고종 5) 거란이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에 이돈수는 중랑장으로 있으면서 큰 공을 세웠다. 관향을 덕수로 한 것은 이돈수가 경기도 덕수현[현 황해도 개풍군] 덕수리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덕수이씨는 우리나라 역사상 위대한 위인인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와 이순신(李舜臣)[1545~1598], 그리고 조선 시대 이기(李芑), 이안눌(李安訥), 이식(李植), 이단하(李端夏)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전체적으로는 100여 명의 문과 급제자와 7명의 정승, 6명의 대제학, 4명의 공신을 냈다.

[입향 경위]

당진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덕수이씨는 10세조 이의무에 이르러 그 연원이 형성되었다. 이의무가 연산군 10년 홍주 목사로 부임하였을 때 관내 말 목장이 있던 현재의 유곡리 부근을 둘러보다 명당이라고 점찍어 두었고, 이의무가 사망한 뒤에 자손들이 송산면 도문리 장자동 능안에 묘소를 조성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의무에게는 맏아들인 이권(李菤)[1467~?]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인 이기(李芑)[1476~1553]는 영의정, 셋째 아들인 이행은 좌의정을 지냈다. 넷째 아들인 이영(李苓)[1481~1546]은 평해 군수를, 다섯째 아들인 이미(李薇)[1484~?]는 예조 판서와 한성 판윤을 지냈다. 이들 5형제를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에 올랐다고 하여 '5도문(五道門)'이라 부른다.

송산면에 입향한 사람은 이행이다. 38세 때인 1517년(중종 12)에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로 신진 사류들과 충돌을 빚게 되자 송산면 삼월리 창택 마을에 낙향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자호를 ‘창택어수(滄澤漁叟)’라 짓고 은거하면서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현재 당진군 천연 기념물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이행의 후손들은 창택 마을에서 터전을 일구고 가세를 확장시켰다.

[현황]

송산면에 거주하는 덕수 이씨 문중은 춘당공파 중의 용재공종파라고 부른다. ‘춘당공(春塘公)’은 고려 공민왕 때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된 6세 이인범(李仁範)의 아들인 이양(李揚)을 가리킨다. 이양의 호가 춘당이었고 조선 초기에 공조 참의를 지냈다. ‘용재(容齋)’는 춘당공의 후손인 11세 이행의 호이며, 이행의 맏아들인 12세 이원정의 직계 후손들을 용재공종파라고 한다.

이안눌도 당진 지역 덕수이씨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안눌이행의 증손자로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추증한 공으로 정미면 사관리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다. 이 때문에 묘소와 신도비가 사관리에 있다. 1706년 이안눌을 배향한 동악 서원(東岳書院)이 송산면 명산리에 세워지면서 덕수이씨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당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동악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에 의하여 폐쇄되고 말았다.

근현대 인물로는 이종혁(李種赫)[1892~1935]이 있다. 이종혁은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독립 투쟁에 헌신하였다. 특히 1923년 남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 단체인 참의부(參議部)의 군사 위원장과 집행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마덕창(馬德昌)이란 가명으로 치열한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그 외에 목천 현감을 지낸 21세손 이덕희(李德熙)가 있고, 27세손 이재인(李載仁)은 성균관 전의, 면의회 의장, 당진 향교 전의를 지냈으며, 27세손 이재서(李載瑞)는 부여 군수와 성균관장을 지냈다.

[관련 유적]

덕수이씨 세장지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산78-1이다. ‘능안’이라 부르는 이곳에는 이의무 신도비(李宜茂神道碑)를 비롯한 많은 유적이 조성되어 있다. 이의무 신도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3호이다. 또한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에는 이안눌 신도비(李安訥神道碑)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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