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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60
한자 孝子
영어공식명칭 Devoted S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정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한 자녀.

[개설]

효자(孝子)는 부모를 극진하게 섬기는 자식을 지칭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효(孝)’를 가장 기본적인 행위 규범으로 강조하여 왔다. 자식은 어릴 때부터 어버이를 존경하는 태도를 갖도록 배우고 익히면서 자랐다. 유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정착되면서, 특히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시대에 ‘효’ 사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부모에 대한 극진한 섬김은 임금을 극진히 섬기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결과적으로 국왕 중심의 지배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효’는 부모의 생존 시에 섬겨야 할 덕목이지만, 부모가 사망한 뒤에도 지속되어야 했다. 당진 지역에서 ‘효자’로 선양되는 전형적인 사례도 이와 같이 두 가지다. 기본적인 효행은 부모의 병 수발이다. 부모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손가락을 잘라 그 선혈을 마시게 하는 경우다. 그러면 임종을 앞둔 부모는 건강을 되찾고 자식은 ‘효도 의무’를 다한 효자가 된다. 또 한 가지 효행은 부모가 사망한 후에 ‘여막 생활(廬幕生活)’ 3년을 하는 사례다. 자식은 관직이나 생업을 포기하고 묘소 근처에 움막을 짓고 묘소를 돌보았다. 국가는 이러한 효자들에게 ‘정려(旌閭)’를 내려 젊은이의 주의를 환기시켰고, 해당 집안에서는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며 자손 교육의 자료로 삼았다.

[현황]

1933년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당진군 효자 편을 보면 64명을 기록하고 있다. 그 명단과 행적은 다음과 같다.

1) 복지겸(卜智謙): 효자다.

2) 이상(李祥): 호는 덕계(德溪)로 신평 사람이다. 평장사 문간공 이덕명(李德明)의 후손이다. 조선 때 진사(進士)다. 7세 때 왜란을 당하여 왜구에 끌려갔지만 평상시 같이 편안히 지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의 처가 그 미모를 흠모하여 사통하고자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주인의 처는 원한을 품고 남편에게 거짓으로 고자질을 하여 남편이 칼로 베고자 하였다. 이에 옷을 벗어 나이가 어림을 보여 주자 크게 놀라 도리어 그 처를 베었다. 당시 왜장이 이상의 인품에 탄복해 보화와 비단을 주면서 귀국하게 하였으나, 이상은 모두 바다에 버리고 꽃 한 송이만 들고 왔다. 돌아왔을 때가 17세였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여서 늦었지만 움막을 짓고 3년상을 치르고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비통하게 울며 시묘하였다. 문장필법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세종 때 정려가 내려졌다.

3) 이사철(李士哲): 신평 사람으로 이상(李祥)의 후손이다.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4) 이빈(李斌): 덕수 사람으로 명신 이행(李荇)의 후손이다. 효행으로 지평(持平)에 추서되었다.

5) 이상구(李尙矩): 신평 사람으로, 효행으로 정문이 내려졌다.

6) 남극창(南克昌): 효행을 하였다.

7) 임약(林若):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8) 신경갑(辛景甲): 신효증(辛孝曾)의 손자로 효행을 하였다.

9) 안효립(安孝立): 효행으로 관직이 자헌(資憲)에 이르렀다.

10) 박순명(朴順明):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11) 이인창(李寅昌): 효행을 하였다.

12) 김욱(金稢): 효행이 있었다.

13) 이성일(李性一): 신평 사람으로 이상(李祥)의 후손 이상구(李尙矩)의 조카다.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렸으나 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연로하여 묘지에 움막을 짓고 기거하지 못하고 아버지 병이 위중해지자 아우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렸다. 아버지상을 당해서는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을 보냈다. 숙종 대에 정려를 세웠는데 문화 유씨를 함께 배향하였다. 효자와 열녀로 고종 때 정려를 세웠다.

14) 이대령(李大齡): 이성일(李性一)의 아들 3형제는 모두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가 병들자, 3형제는 모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40일을 더 살게 하였다. 두 세대 다섯 사람이 여섯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세상에 드믄 일이다. 고종 때에 정려를 내렸다.

15) 구택남(具宅南): 호는 둔재(遯齋)다. 능성 사람이다. 훈신 구문신(具文信)의 후손이다. 도암(陶菴)의 문인일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효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5세 때 어머니를 여의자 슬픔에 소리 내어 부르짖으며 숨이 끊어질 듯하게 울었다.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그 예를 다하며, 맛좋은 음식으로 봉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이 심해 의사를 모셔야 하는데 스스로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았다. 아버지상을 당하여 슬픔에 몸이 상하였고, 눈물이 계속 흘러 피눈물로 이어지고, 상복의 삼베 끈을 풀지 않고 매일 성묘를 갔다. 계모 서씨를 봉양함에도 매우 극진하게 효성을 다했으며, 크고 작은 일에도 명령을 따르며 서씨를 거역한 적이 없었다.

16) 윤설(尹設): 효로 칭송되었다.

17) 신효련(辛孝連): 효행이 있었다.

18) 이여란(李汝蘭): 효로 칭송되었다.

19) 조옥(趙沃): 효행이 있었다.

20) 강척(姜倜): 효행이 있었다.

21) 황일수(黃日壽): 효로 칭송되었다.

22) 박희란(朴希蘭): 효행으로 정려가 세워졌다.

23) 박희전(朴希筌): 효행으로 정려가 세워졌다.

24) 육상현(陸尙賢): 효로 칭송되었다.

25) 박효건(朴孝騫): 효행이 타인에 비하여 탁월하여 정려가 세워졌다.

26) 이성규(李聖規) - 전주 사람으로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후손이며 삼백당(三栢堂) 이승당(李承當)의 7대손이다. 참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섬김에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어 진귀한 것을 보면 반드시 진상코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부친이 병이 나자 그 변의 쓰고 단 맛을 보고 약으로 꿀을 구하려고 벌이 보이면 길을 막고 구멍을 찾아 그것을 얻었다. 병이 위중해지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렸다. 모친이 걱정으로 부종으로 생기자 의사는 마땅히 청둥오리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갑자기 날아오르는 새 세 마리를 몰아 두 마리를 잡아 진상했는데 효험이 있었다. 상을 당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3년을 보냈고, 고종 조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내렸고 정려를 세웠다.

27) 이희천(李喜天): 전주 사람이다. 이성규(李聖規)의 아들이며 가정의 효도를 이어받았다. 부모의 병이 위중해지자 직접 대변을 맛보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다.상을 당해서는 너무 슬퍼 몸이 망가질 정도였으며, 묘지 옆에 움막을 지어 3년을 거쳐했다. 고종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내렸고 정려를 세웠다.

28) 이희성(李喜盛): 전주 사람이며 이희천(李喜天)의 아우이다. 천성이 순수하며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효로 모심에 끝이 없었다. 부모가 병환이 들면 그 대변의 달고 쓴 맛을 직접 맛보았으며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어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모두 효성이 지극하여 이희성의 집안을 일문 삼효(一門三孝)라 부르며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향리의 많은 선비들이 받들지 않은 이가 없었고, 정려를 세웠다.

29) 이희창(李喜昌): 전주 사람이며 이희천(李喜天)의 아우이다. 형제가 모두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어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 부모가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생명을 연장했다. 고려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내려 정려를 세웠다.

30) 구수천(具修天): 호는 선옹(仙翁)이다. 능성 사람으로 구택남(具宅南)의 손자이며 관직은 재랑(齋郞)이다.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주경야독하며 부모를 봉양함에 거역한 적이 없었다. 부모가 육순을 넘기면서 모두 중풍을 앓게 되었는데, 부모가 나이 여든 살이 될 때까지 맛좋은 음식을 드리며 시종일관 한결같이 모셨다.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9일을 더 살게 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몸이 망가지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슬퍼하였다. 묘지 옆에 움막을 지어 3년 동안 돌보았다. 그 동네를 시묘동(侍墓洞)이라 명명하였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내리고 정려를 세웠다.

31) 강효관(姜孝寬): 강척(姜倜)의 아들이며 지극한 효성으로 칭송받았다.

32) 강우(姜瑀): 강척(姜倜)의 손자이며 효행이 지극하였다.

33) 전동열(全東烈): 자는 여문(汝文)이다. 천안 사람으로 문효공(文孝公) 전백○(全栢○)의 후손이자, 시종(侍從)으로 추서된 전치규(全致奎)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했다. 어머니 정씨의 나이 70을 넘겨 중풍을 앓게 되자 스스로 보호하며 잠시라도 곁을 떠난 것이 없었다. 약을 드리고 맛난 음식을 바치기를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너무 슬퍼 몸이 상하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괴로워하며 3년상을 마쳤다. 베풀고 가난을 구휼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삼강록(三綱錄)과 포창문(褒彰文)을 받았다.

34) 이대주(李大柱): 자는 여현(汝賢), 호는 자호당(紫胡堂)이다. 신평 사람으로 이상(李祥)의 후손이다. 9세가 되어서 스승을 따라 학문하였고, 부모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가 병들자 밤낮으로 탕약을 바쳤고, 대변을 맛보며 천수를 누릴 것을 기도하였다.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어 3일간 더 살게하였다. 상을 당하자 몸이 상하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슬퍼하며 3년상을 마쳤고, 사림들이 천거하여 추대하였다.

35) 조면교(趙勉敎): 자는 중구(重九), 호는 윤산(潤山)이다. 한양 사람으로 한천 부원군 조온(趙溫)의 후손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여 재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부모 모시기를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효를 행하며 날이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이를 멈춘 적이 없었다. 부모가 병이 들자 탕약으로 시봉(侍奉)하고 대변을 직접 맛보았으며, 상을 당하자 너무 슬퍼 가슴을 치고 몸부림치며 통곡하였고 3년 동안 고기를 먹거나 좋은 곳을 입지 않았다. 이에 사림의 포창문(褒彰文)이 있다.

36) 박준빈(朴準彬): 자는 덕문(德文), 밀양 사람이다. 문도공(文度公)의 후손이다. 부모를 봉양하는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이 들자 한 달 동안 대변을 맛보며 그 증세를 살폈다. 병의 증세가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서 3일을 더 살게 했으며, 상을 당해서는 묘지 옆에 오두막을 짓고 기거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삭망(朔望)[상중(喪中)에 있는 집에서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에는 성묘(省墓)하며 비바람이 불어도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선도정(嘉善都正)으로 추대되었고 사림들이 탄복하여 포창문(褒彰文)을 주었다.

37) 이부운(李敷運): 호는 미은(嵋隱), 함평 사람이다. 함성군종(咸城君從) 이생(李生)의 후손이다. 부모를 섬김에 예를 다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맛난 음식으로 봉양하여 정성을 다했다. 부모가 병이 생기자, 그 대변을 스스로 맛보고 손가락을 찢어 입에 피를 흘려 넣기를 몇 차례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묘지 옆에 움막을 지어 기거하며 상을 마쳤다.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내리고 정려를 세웠다.

38) 인범석(印範錫): 자는 치구(穉九), 교동 사람이며 유행 인재현(印載鉉)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일찍이 조깃국을 먹다가 생선뼈가 가슴을 찔러 평생 조기를 먹지 않았다. 이때 인범석의 나이 13세였는데 밤낮으로 의학 지식을 자세히 살펴 읽으며 소 힘줄을 잘근잘근 씹어 뱉어 내어 이것으로 탕약을 만들어 진상하여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이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내렸다.

39) 이영유(李泳儒): 자는 경함(敬咸), 호는 죽오(竹塢)이다. 함평 사람 이부운(李敷運)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병들자 대변을 스스로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었다.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았으며, 고종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내렸고, 정려를 세웠다.

40) 홍태후(洪泰厚): 자는 노첨(魯瞻), 호는 소사(小史)다. 남양 사람이다. 장민공(莊敏公) 홍숙(洪淑)의 후손이며, 국사(菊史) 홍재승(洪載承)의 둘째 아들이다. 부모의 집이 고개를 하나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심한 눈과 큰 비가 내리더라도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효행을 멈추지 않았다. 부모가 병이 들면 제단을 만들어 천수를 기도드렸으며, 병의 위중해지면 대변을 스스로 맛보았다. 상을 당하자 묘는 5리에 두고 삭망(朔望)에 성묘(省墓)하며 평생 동안 멈춘 적이 없었다. 사림들이 칭송하며 감탄했다.

41) 심능직(沈能稷): 자는 원시(元始), 호는 동원(東園)이며 청송 사람이다. 사마(司馬) 심휴(沈銝)의 손자이며 가선(嘉善) 심○지(沈○之)의 아들이다. 성품이 본래 효성이 지극하여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드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이 47세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묘지 옆 움막에서 기거하였는데, 3년상이 다 끝나기도 전에 향당에서 효성을 칭송하였다.

42) 한진하(韓鎭夏): 자는 영섭(永燮), 청주 사람이다. 청성군(淸城君) 문경공(文敬公)의 후손이며, 청릉군(淸陵君) 한상(韓相)의 17세손이다. 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모심에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드리며 거역한 적이 없었고, 서모(庶母)를 모심에도 이와 같았다. 아버지상을 당하자 몸이 상할 정도로 몹시 슬퍼하였고, 친족 중에 빈궁하여 입을 옷조차 없는 자가 있으면 재산을 내주어 구휼해 주었다. 온 마을에서 감탄하고 칭송하여 포창(褒彰) 완의문(完議文)을 내렸다.

43) 정영조(鄭永朝): 자는 자삼(自三), 동래 사람이다. 영의정 정익헌(鄭翼憲)과 공양파(公陽坡) 정태화(鄭太和)의 후손이며, 정경재(鄭敬載)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버지상을 당해서는 몸이 상할 정도로 몹시 슬퍼하며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기거하였다. 3년을 보내며 잠시도 떠난 적이 없어 표창을 내리고 정려각을 세웠다.

44) 최규환(崔圭煥): 자는 준명(俊明)이다. 전주 사람이며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후손이다. 나이 16세에 외란을 만나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며 상을 치렀다. 홀어머니를 모시는데 집이 가난하였다. 최규환은 밤에는 돗자리를 짜고 낮에는 날품팔이를 하였다. 그리고 삯돈을 모아 어머니가 쓰시기에 편리한 물건을 구입하였고, 항상 넉넉하게 해 드렸다. 이에 포창문(褒彰文)을 내렸다.

45) 강행주(姜行周): 자는 용서(龍瑞), 호는 근검재(勤儉齋)이며 진주 사람이다. 일장령(逸掌令) 복천(復泉) 강학년(姜鶴年)의 후손이다. 관직은 참봉(參奉)이고 품계는 가선(嘉善)에까지 올랐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나, 3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하지만 어머니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는 것과 같이 하였고, 크고 작은 일 모두 반드시 녹미(祿米)를 받아서 그것을 행하며 하나도 어김이 없었다. 농사에 힘썼고 품을 팔아 봉양하였다.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병세를 살피기 위해 대변을 맛보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였다. 어머니자 사망하자 너무 슬퍼하는데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이에 군수 심영경(沈英慶)이 큰 상을 내렸고, 어사 이건창(李建昌)도 상을 내렸다.

46) 문원주(文元柱): 자는 여원(汝元), 호는 저재(樗齋)이며 남평 사람이다.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손가락을 잘라 3일 동안 입에 피를 흘려 넣어 다시 살아나게 하였다. 이에 감찰(監察)을 증직하고 정려를 하사했다.

47) 문충식(文忠植): 자는 보현(輔賢), 호는 하은(荷隱)으로 남평 사람이다. 충선공 문익점의 후손이다. 관직은 의관문학(議官文學)이었으며, 사람됨이 맑고 고결하며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벗에게 정성을 다함이 남달랐다. 어머니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어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이에 효자 정려를 받았다.

48) 이세연(李世淵): 자는 경삼(敬三), 호는 ○隱(○隱)으로 완산 사람이다. 광평 대군(廣平大君) 장의공(章懿公) 이여(李璵)의 후손이자 이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의 손자다. 효성이 두텁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맛난 음식으로 봉양함에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다. 부모가 병환으로 쓰러지면 정성으로 보살펴 치료하였고,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며 여막을 지어 기거하였다. 성리학 등의 서적을 공부하고 사림들이 천거하여 상금과 완의문(完議文)이 있다.

49) 유하일(柳河一): 서령 사람이다. 서령군(瑞寧君) 문목공(文穆公) 유숙(柳淑)의 후손이며 유우진(柳禹鎭)의 아들이다. 관직은 주사(主事)이며, 성품이 온화하고 단정하며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였다. 부모를 섬김에 예를 다하여 좋은 음식으로 봉양함에 어긋남이 없이 극진하였다. 부모가 노환으로 병이 심해지자 정성껏 탕약을 올렸고, 상을 당했을 때에는 몸이 망가질 정도로 슬퍼하였다. 사림들이 천거하여 완의문(完議文)이 있다.

50) 이희규(李羲奎): 호는 율정(栗亭)이며, 완산 사람이다. 진안 대군(鎭安大君) 정의공(貞懿公) 이방우(李芳雨)의 후손이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나 집이 가난하고 평범하였다. 그러나 가난 속에서도 정성으로 부모를 섬겨, 예의에 조금이라도 벗어남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대변을 맛보며 천수를 누릴 것을 기도했다. 아버지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리며 상제로 지내는 3년 동안 비바람에도 그치지 않고 매일 성묘를 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면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내 효과를 보았고, 위중해지자 어머니의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했다. 어머니상을 당하자 아버지 상을 치를 때와 같이 했다. 아내인 신평 이씨는 효행이 있어 포창문(褒彰文)을 받았다.

51) 조순교(趙淳敎): 자는 무재(武才)이며, 호는 지봉(芝峰)이다. 한양 사람이다. 관직은 참봉(參奉)이며,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의 후손이다. 문학(文學)으로 이름난 조종숙(趙從叔)의 후손이다. 부모를 봉양함에 지극 정성을 다하다 사망하였다. 사림이 그 효성을 칭송하여 정려를 명하여 비를 세웠다.

52) 이철호(李哲鎬): 호는 죽석(竹石)이고 전의 사람이다. 문희공(文羲公) 운재(雲齋) 이언충(李彦冲)의 후손 이교영(李敎永)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우아하며 부모를 효성으로 모시고 윗사람을 공경하였다. 오직 명(命)이 있으면 따르며, 한 번이라도 뜻을 어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긴 병을 앓자 탕약으로 모시길 1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향리 이웃들이 그 효성을 칭송하여 포창문(褒彰文)이 있다.

53) 박용훈(朴容勳): 자는 혼하(渾河), 호는 죽당(竹堂)이며 밀양 사람이다. 박남병(朴南秉)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부모를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했다. 나이 약관에 외란을 만나 부친을 잃고 슬퍼함에 몸이 상했다. 홀어머니를 모심에 극진하게 정성을 다하였으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어머니의 뜻을거스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고 천수를 기도드렸으며,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었다. 어머니상을 당하자 예를 다해, 상복을 입을 때 쓰는 베띠를 풀지 않았으며 매일 성묘하였다. 우애 깊고 선의를 잘 베풀었기에 포창문(褒彰文)이 있다.

54) 김은경(金殷卿): 호는 죽정(竹亭)이고, 강릉 사람이다. 판서(判書) 설파공(雪坡公) 김득인(金得仁)의 후손이며 봉사(奉事) 김학인(金學仁)의 증손자다. 3세에 부친을 잃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맛난 음식으로 홀어머니를 모신느 데 어긋남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탕약으로 모셨으며, 천수를 기도드리고 대변이 달고 쓴지를 맛보았다. 형이 둘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방이 무너지고 살 곳을 잃게 되었다. 다섯 차례 성묘직원(聖廟直員)에 임명되었고 포창문(褒彰文)이 있다.

55) 김일두(金壹斗): 김해 사람이며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 김창업(金昌業)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맛난 음식을 바쳐서 부모가 맛보지 않은 음식이 거의 없었다. 부모가 병이 들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하였으나, 결국에는 효험이 없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슬프게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60의 늙은 나이에도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지어 그곳에서 3년을 거주했다. 포창문(褒彰文)이 있다.

56) 안종문(安鍾文): 자는 종락(鍾樂)이며, 호는 삼은(三隱)이다. 광주 사람이다. 좌참찬(左參贊) 청백리(淸白吏)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후손 참봉(參奉) 안봉원(安鳳遠)의 아들이다. 7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한평생 통한 속에서 살며 항상 베로 만든 띠를 묶고 다녔다. 어머니 안동 김씨의 병이 깊어지자 어머니의 대변을 맛보며 천수(天壽)를 기원하였으며, 동생 안종무(安鍾武)와 함께 손가락을 찢어 입에 흘려 넣으며 3일을 버티게 했다. 어머니상을 치르며 슬퍼하여 얼굴이 상했다. 아버지의 묘와 합장하여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찾아가 울었고, 삭망일(朔望日)에는 반드시 성묘하였다. 사림이 천거하여 드높였다.

57) 백영기(白永基): 자는 치경(致敬), 호는 원천(原泉)이다. 수원 출신이다. 충숙공(忠肅公)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익혔으나 집이 가난하여 10년 동안 상업에 종사하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종기가 나자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으며, 어머니가 넘어져 오른손을 다치자 침과 약을 쓰지 않고 손을 잡고 목 놓아 3일 밤낮으로 울었다. 어머니가 84세 때 사망하자 백영기는 63세의 나이에도 피눈물을 흘리며 상복을 벗지 않고 삭망에는 반드시 성묘하였으며 비와 눈이 올 때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사림들이 추대하여 높였다.

58) 전원하(全元夏): 자는 원경(元敬)이며, 호는 명암(明菴)이다. 천안 사람이다. 협판(協辦)으로 증직된 전봉한(全鳳漢)의 아들이며 관직은 의관(議官)까지 올랐다.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고, 어머니 심씨가 병들어 자리에 눕자 홀아비로 홀로 지내며 치료에 전념하였다. 아버지상을 당하자 수년간 편히 지내지 못했으며, 겨울에는 옷에 솜을 넣지 않았고, 여름에는 갈옷을 입지 않았다. 선대의 일은 힘을 다해 정성을 쏟아 완의문(完議文)이 남게 되었다.

59) 문홍렬(文弘烈): 자는 의숙(義淑)이고, 호는 해창(海滄)으로 남평 사람이다. 충선공 문익점의 후손이며, 관직은 의관(議官)에 이르렀다. 천성이 지극히 순수하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찢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낫게 하였다. 포창문(褒彰文)이 있다.

60) 장두식(張斗植): 자는 여춘(汝春)이고, 호는 국사(菊史)다. 인동 사람이다. 형조 판서 옥천군(玉川君) 장부정(張富禎)의 후손이다. 나이 16세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빙어(氷魚)를 얻어 효과를 보았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하늘과 땅에 기도하여 꿈속에서 신령이 소시호탕(小柴胡湯)[한방에서 급만성 질환에 쓰는 탕]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지어 바쳤더니 효과가 있었다. 어머니의 병이 위중해지자 대변을 맛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했고, 상을 당하자 묘지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을 기거하며 매일 성묘하였기에 포창문(褒彰文)이 있다.

61) 조정식(趙貞植): 임천 사람이다.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의 후손이다. 천성이 온후하고 부모를 섬김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맛난 음식으로 봉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즐겁고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 드렸다. 사림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고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하였다.

62) 표순영(表舜榮): 신창 사람이다. 판서 남계(藍溪) 표연수(表沿洙)의 후손이다. 효행이 남달라 부모의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어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상을 당하자 몸이 몹시 야윌 정도로 슬퍼하였다. 향리에서 효를 칭찬하여 포상을 하였다.

63) 최병주(崔秉周): 자는 만보(萬甫), 호는 모암(慕庵)이다. 경주 사람이다. 충의공(忠毅公) 율암(栗庵) 최몽량(崔夢亮)의 후손이다.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집안이 가난하고 궁핍하여 검소한 음식을 드려 봉양했다. 기이한 맛을 얻게 되면 반드시 바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으며, 어머니가 술을 좋아하여 시장에서 사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병이 위중해지자 빙어(氷魚)를 바쳤으며, 상을 당했을 때에는 3년 동안 묘지 옆에 오두막을 짓고 지내 무릎이 온통 다 헤졌다. 관부로부터 포상이 있었고, 또한 완의문(完議文)이 있으며 비각을 세웠다. 아들 최낙범(崔洛範) 역시 효행이 깊었다.

64) 이종고(李種皐): 자는 순좌(舜佐), 호는 수오(水梧)다. 덕수 사람이다. 명신(名臣) 이행(李荇)의 후손인 무안 현감 이영수(李永壽)의 아들이다. 성격이 본래 인자하고 순수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부모를 섬김에 정성이 지극하였다.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렸으며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고 맛나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때때로 크고 작은 일을 만나게 되면 일일이 여쭈어 아뢰고 난 후에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거의 어긋남이 없었다. 향당(鄕黨)에서 칭송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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