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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사 전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346
한자 九龍寺傳說
영어공식명칭 Legend of Guryongsa Temple
이칭/별칭 신암사 전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길 166-7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구자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9년 - 「구룡사 전설」, 『송악면지』에 수록
관련 지명 신암사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길 166-71 지도보기
성격 전설
주요 등장 인물 구예(具藝)|아주 신씨(鵝州 申氏)
모티프 유형 은혜(恩惠)의 보답(報答) 모티프|명당(明堂) 모티프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신암 마을신암사와 관련해 전해 오는 이야기.

[개설]

「구룡사 전설」당진시 송악읍 가교리에 있는 신암사의 명칭에 관한 기원을 담고 있다. 능성 구씨 4세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는 중대광판전의시사(重大匡判典儀侍事)가 되어 원나라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던 길에 빚을 갚지 못한 한 남자를 구원한다. 구예는 도움을 준 그 문객으로부터 신위지지를 얻게 된다. 구예가 죽자 자손들은 문객이 보아 놓은 터인 송악 가교리 신암산 자락 지자혈(地字穴)에 묘를 썼다. 한편 그의 부인 아주 신씨(鵝州申氏)는 죽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절을 세우는데, 그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지었다. 1969년 능성 구씨 신암 종중에서 구룡사를 중수하고 절의 이름을 ‘신암사(申菴寺)’라 하였다.

[채록/수집 상황]

「구룡사 전설」은 2009년 12월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서 간행한 『송악면지』에 실려 있다.

[내용]

고려 충숙왕 대에 능성 구씨 4세조 중대광판전의시사 구예가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압록강에 다다른 구예는 한 남자가 강으로 뛰어들어 자결하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만류하였다. 그는 곡창 직위를 맡아 보던 중 가난 때문에 사사로이 곡식을 축내게 되었고, 결국 곡식 값 3,000냥을 못 갚아 자결하려 했다고 했다. 구예는 그 돈을 대신 갚아 주었다.

구예가 원나라에서 귀국하는 길에 그 내외가 문객이 되기를 청하자 구예는 기꺼이 3년간 자신의 집에서 문객 생활을 하게 하였다. 3년 후, 그 부부가 떠나던 날 그들은 구예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신위지지(身爲之地)를 보여 주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충청도 면천현에 삼혈(三穴)이 있는데 천자혈(天子穴)은 비룡상천(飛龍上天)이요, 삼대걸식후 구대입각지(三代乞食後 九代入閣地)이고, 지자혈(地字穴)은 금계포란혈(金鷄抱卵穴) 만대영화지지(萬代英華之地)이며, 인자혈(人字穴)은 옥녀탄금(玉女彈琴)이요, 서손대발복(庶孫大發福)이라 하였다. 구예는 묏자리로 지자혈을 택하였다. 부인 신씨가 그곳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인지를 묻자 그 문객은 이 터에 절을 지으면 구룡(九龍)이 보호해 줄 것이라 하였다. 그 후 신씨는 늘 그곳에 절 지을 걱정을 하였다.

그러다가 신씨가 구예와 원나라에 동행하여 중국 숙소에 머물던 어느 날이었다. 신씨가 잠결에 꿈을 꾸었는데 부처가 신씨를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며칠째 같은 꿈을 꾼 신씨는 수소문 끝에 근처에 있는 절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절의 승려가 아무 인연도 없는 신씨에게 인도금동불(印度金銅佛)을 전해 주었다. 신씨는 그 불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구예가 죽자 가족들은 문객이 잡아 준 터에 묘를 썼다. 그리고 신씨는 구룡사라는 99칸의 절을 지어 인도 금동불을 모시고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절 옆에는 작은 연못을 팠는데 그곳에 고동 조개를 길렀다고 한다. ‘구룡사’라는 이름은 인근의 지형을 딴 것으로 ‘구룡’은 지금의 소지명으로 보면 덕머리, 쪽지머리, 방아머리, 쇠창머리, 나루머리, 굴머리, 서원머리, 개머리, 용머리의 아홉 머리를 뜻한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구룡사 전설」은 은혜의 보답 모티프와 명당 모티프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이야기이다.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신위지지를 정해 주고 후손이 번영을 이루는 것은 전래의 지명이나 명칭 전설에 흔히 나타나는 구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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