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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43
한자 綾城具氏
영어공식명칭 Neungseong Gusi|Neungseong Gu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구자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330년대 - 능성구씨 입향조 구예 당진 입향
본관 능성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입향지 능성구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가교리 능성구씨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묘소|세장지 능성구씨 당진 입향조 구예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성씨 시조 구존유(具存裕)
입향 시조 구예(具藝)

[정의]

구존유를 시조로 하고 구예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는 고려 시대 벽상 삼한 삼중대광 검교 상장군(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上將軍)을 지낸 구존유(具存裕)이다. 고려 시대에는 구민첨(具民瞻)이 평장사를 지냈고, 면성 부원군(沔城府院君) 구연(具珚)은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냈으며, 조선 시대에는 구치관(具致寬)이 영의정을 지냈다. 구사맹(具思孟)의 딸은 인조의 어머니로 인헌 왕후에 추존되었다. 이 외에도 충청남도 당진시에 세거지를 형성한 유력 성씨로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연원]

능성구씨의 시조는 구존유이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활동한 7세조에 이르러 11개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9개 파가 실존하고 2개 파는 자손이 끊겼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3세조 구연(具珚)이 7형제를 낳았는데 그중 첫째가 구의(具宜)이다. 구의의 증손인 7세조 구현좌(具賢佐)가 판사파(判事派)의 파조이고, 구현좌의 아우 구현노(具賢老)는 전서파의 파조이다. 구연의 여섯째 아들 구천용(具天容)의 증손인 7세조 구영량(具英良)이 시랑파(侍郞派)의 파조이다. 일곱째 아들은 구예(具藝)로, 증손 대에 이르러 가장 번성하였는데 7세조 구홍(具鴻)은 좌정승파(左政丞派)의 파조이며, 구성량(具成亮)은 판안동파(判安東派)의 파조이다. 또한 구성노(具成老)는 도원수파(都元帥派)의 파조이며 구현보(具賢輔)는 낭장파(郎將派)의 파조이다. 같은 7세조 구현기(具賢器)는 감무파(監務派)의 파조이며 구충노(具忠老)는 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의 파조이다. 그리고 구성미(具成美)는 참판파(參判派), 구원립(具爰立)은 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의 파조이다. 그중에 전서파와 임천군사파는 중간에 자손이 끊겨 현재는 9개 파가 번성하고 있다.

[입향 경위]

고려 충숙왕 대에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능성구씨 4세조인 구예의 산소가 정해지고 구예의 부인 아주 신씨(鵝州申氏)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 구룡사(九龍寺)[현재 신암사(申菴寺)]라는 절을 세웠다. 구예는 고려 충숙왕 대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구예의 증손자인 구성량과 그 후손들이 판안동파를 형성하여 현재까지 일대에 세거하면서 송악읍 가교리능성구씨 세거지가 되었다. 특히 구예의 후손은 전체 구씨의 91%를 차지할 정도로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그중에서 판안동파가 가교리방계리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7세조 구현좌의 후손인 판사파가 당진시 정미면 봉생리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현좌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출사하기를 거부하고 은둔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구현좌의 아들인 구인문봉생리에서 출생하여 세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집현전 교리를 거쳐 좌정언(左正言)에 올랐는데, 수양 대군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자 일시 보성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바로 사직하고 봉생리로 돌아와 두문불출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봉생리를 ‘두문동’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현황]

능성구씨는 근 800년의 역사를 간직하면서 공신, 충신, 학자, 효자 등 무수한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오래도록 번창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0년 현재 우리나라 능성구씨는 37,706가구에 인구는 12,503명이라고 한다.

[관련 유적]

입향조 면성 부원군 구예가 죽은 뒤 산소를 가교리 신암산에 정하자 부인인 아주 신씨가 이곳에 구룡사라는 절을 지어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구예와 부인 신씨의 묘 옆에 있는 구룡사는 1920년경부터 신암사라 부르고 있다. 신암사 경내 사찰 뒤편에는 구예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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