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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의 뿌리, 면천-읍성과 인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34
한자 唐津-沔川邑城-人物
영어공식명칭 Root of Dangjin, Myeoncheon-Fortress and Figur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학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663년 - 백제 풍왕 피성 천도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속한 옛 면천군 출신의 역사적 인물과 치성인 면천읍성.

[개설]

면천군은 옛 백제의 군현으로 내포 지방의 중심이던 곳이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후에는 백제 부흥군의 왕도이던 피성(避城)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백제와의 관계는 면천 사람들이 신라 조정에 반감을 품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면천 출신 인물들은 신라 말에는 후삼국으로 분열한 가운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왕건을 돕게 된다. 이 과정에서 면천 출신의 삽교천 해상 세력은 고려 조정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고려 건국과 통일 전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면천을 기반으로 한 호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고려 정치를 좌우하는 주역이 되고,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한편 면천의 치성은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하면서 조선 초기에 평지성인 읍성을 건설하였다. 면천군의 치성인 면천읍성의 건설은 면천군이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면천읍성의 건설 이후 면천은 급속히 성장하여 내포 지방의 주요 군현이 되었다. 면천읍성면천군 출신의 인물들은 그렇게 역사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면천읍성의 역사]

면천읍성은 옛 면천군의 치성(治城)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의하면 옛 면천군은 백제 때 혜군으로 불렸다. 백제 패망 이후 신라에 속했는데, 신라 경덕왕 때 혜성군(槥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면천의 호족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통치하였는데 고려 조정에서도 직접 관리를 파견하지 못하여, 1018년(현종 9)에 지금의 홍성 지방인 운주(運州)에 관리를 파견하고 호장(戶長)이 통치하던 면천을 운주의 임내(任內)로 삼았다가, 뒤에 지방 관리인 감무(監務)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1290년(충렬왕 16)에 이르러 개국 공신 복지겸의 후손인 복규(卜奎)가 거란의 침입을 막는데 공이 컸으므로, 지면주사(知沔州事)로 승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서 면천군으로 고쳤다. 조선 시대 면천군당진현, 여미현, 신평현 등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던 내포 지방의 거군이었다. 면천군은 1895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속현이던 당진현이 당진군으로 승격되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당진군과 합군되어 없어졌다.

조선 시대 면천군의 치소(治所)는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일대에 있었다. 최근 발굴 결과를 보면, 면천면 성상리에 있는 성상리 산성이 면천의 최초 치소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면천군의 건치 연혁에 통일 신라 때의 ‘혜성군(槥城郡)’이란 이름이 나와 있다. 이것으로 보아 혜성군은 혜성이라는 성을 치소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부흥 전쟁이 전개되던 663년에 백제 풍왕이 피성(避城)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피성은 오늘날 몽산성으로 혜성을 의미한다. 고대의 언어에서 피와 혜는 같은 발음이었기 때문에 ‘피성’과 ‘혜성’은 같은 성을 지칭하는 지명이다. 이렇듯 혜성은 인근 임존성, 주류성과 더불어 백제의 가장 중요한 행정 치소이자 방어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면천이 백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나를 알 수 있게 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 항목에 몽산성(蒙山城)이 나온다. 현재 면천면 몽산성 남쪽에는 ‘잣골’, 북쪽에는 ‘잣디(城北)’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잣은 주로 통치성에 사용되는 성(城)에 대한 순우리말이다. 이와 같은 기록과 유적·지명을 놓고 볼 때 몽산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면천군의 통치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 항목에 의하면, "둘레 1,314척의 석성으로 안에 우물이 2개 있다."라고 하였고, 산천 항목에는 "몽산이 읍치의 북쪽 4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 몽산[299m] 정상을 둘러싼 몽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몽산성에 대해 『세종실록』 1437년(세종 19) 6월 2일의 기록에는 “면천산성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넓고 험해서 백성들이 꺼리니 읍성을 축조하는 것이 낫다.”라고 나온다.

1438년(세종 20) 9월 20일에는 읍성을 축조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1439년(세종 21) 면천읍성을 완성하여 치소를 옮기게 되었다. 면천읍성은 전형적인 고려 말 조선 초의 평지성이다. 이렇게 면천읍성을 쌓게 된 이유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성행하던 왜구의 침입과 관련이 있다. 면천군은 해안 지대로 바다와 접해 있어 왜구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다. 왜구의 침입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급습을 당하게 되면 백성들이 빨리 피신해야 하는데, 몽산성은 너무 험한 곳에 있어 피하기 어렵고, 성은 넓고 백성은 적어 방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평지성에 면천읍성을 쌓고 행정 치소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쌓은 면천읍성은 둘레가 약 1,200m에 달하고, 평면은 네모꼴에 가까운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성문은 남문·동문·서문이 있었다. 남문은 옹성(甕城)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유용하게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남문과 서문에는 문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 역시 7개의 치성(雉城)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면천읍성에 대해 1451년 『문종실록』에 “둘레가 3,225자이고, 높이가 12자, 여장(女墻)[성가퀴, 성 위에 활 또는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 쌓은 작은 성벽]은 56개이고 여장 높이가 3자, 적대(敵臺)[성문 양옆에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지키는 방형의 대]가 7개, 문이 3개인데, 2개는 옹성이 없고, 성 안에 우물이 3개가 있고, 성 밖에 해자(垓字)[성 밖으로 둘러 판 못]가 파여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면천읍성을 세운 이후 성을 새로 쌓은 효과가 나타났다. 왜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 이후에는 왜구의 침입도 점차 줄어들게 되어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면천읍성이 평지성으로 축조된 이후 면천읍성을 찾고 이용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이로써 면천군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내포의 거군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면천 출신의 역사적 인물]

면천군에서는 여러 인재들이 나와 역사적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러한 면천 출신 인재들의 활약은 면천군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중 고려 초 활약했던 복지겸(卜智謙)박술희(朴述熙)가 있다. 고려 초기 면천 출신의 복지겸박술희가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막대한 공을 세우고 고려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삽교천 유역 해상 세력의 활약과 무관하지 않다. 왕건궁예를 대신하여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던 배경은 예성강 해상 세력과 연대한 복지겸박술희삽교천 해상 세력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면천의 삽교천 해상 세력은 고려의 유력한 호족으로 고려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 조정에서 면천 출신 인물들의 영향력은 막강하였고,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이들 면천 출신 인물들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복지겸

복지겸배현경, 신숭겸, 홍유 등과 함께 고려의 4대 1등 개국 공신이자 면천 복씨의 시조이다. 신라 말 아산만 삽교천 유역을 배경으로 한 호족 복학사의 후손으로 초명은 사괴(砂瑰)·사귀(沙貴)이고 시호는 무공(武恭)이다. 신라 말 양길의 휘하에서 신임을 받았는데, 궁예에게 의탁하여 태봉의 마군(馬軍) 장수로 성장하였다. 궁예가 횡포해져서 민심을 잃자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우게 하였다. 그 뒤 환선길(桓宣吉)의 반역 음모를 적발, 주살(誅殺)시켰으며 임춘길(林春吉)의 역모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복지겸은 말년에 면천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지금도 면천에는 복지겸과 그 딸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면천읍성 안 옛 면천 초등학교 교정에 천연 기념물 제551호로 지정된 면천 은행나무가 있고, 진달래로 술을 담아 복지겸의 병을 낫게 했다는 두견주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2. 박술희

박술희는 고려 초기 무신이자 고려 건국과 통일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개국 공신이다. 박술희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로 시호가 엄의(嚴毅)이다. 아버지는 대승(大丞)이던 득의(得宜)로 복지겸의 경우처럼 아산만 삽교천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해상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술희는 18세 때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고, 이후 왕건을 섬기면서 대광(大匡)이 되었다. 태조 왕건의 신임이 두터워 고려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도맡아 했다. 태조장화 왕후의 소생인 무(武)[훗날의 혜종]를 태자로 책봉하는데, 박술희의 도움으로 가 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943년에 태조가 붕어할 때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술희의 처신은 결국 자신을 옥죄는 요인이 되었는데, 『고려사』 ‘박술희전’에 의하면 정종이 의심하여 박술희를 갑곶(甲串)[지금의 강화]에 유배를 보내고, 왕규가 왕명을 사칭하여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되었으며, 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3. 복규

복규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면천(沔川), 개국 공신 복지겸의 후손이다. 1291년(충렬왕 17) 합단적(哈丹賊)[원의 반란군]이 원주를 침략하자 원주산성 방호별감(原州山城防護別監)으로 있으면서 원충갑(元沖甲)과 함께 이를 크게 무찔렀다. 이 공로로 다음해에 지서경 유수(知西京留守)가 되었으며, 1293년에는 고향인 면천현이 감무(監務)에서 현령이 파견되는 현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판서(判書)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뒤 이전의 공로로써 다시 한 번 상전이 베풀어졌다.

4. 복위룡

복위룡(卜渭龍)은 고려 태조 때의 명신 복지겸의 후예이다. 면천(沔川) 사람으로 자(子)는 운학(雲擧)이고, 호(號)는 어은(漁隱)이었다. 학문이 매우 깊어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과 친교가 깊었다. 이들과 더불어 국운을 만회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고 72인의 신하들이 조정을 하직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망국의 한을 되새기는 중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타살되고, 이색이 여주(驪州)에서 사라지자 시골에 묻혀서 여생을 지냈다. 그는 이성계의 초빙을 받았으나 끝내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산수와 더불어 망국의 한을 슬퍼하다가 죽은 학자이며 효자다.

5. 구영검

구영검(具榮儉)은 고려 공민왕 때 문신으로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초명은 정(貞)이었다. 면천(沔川) 출신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으며, 1354년(공민왕 3) 면천군(沔川君)에 봉해졌다. 1354년 원나라의 장사성(張士誠)이 고우성(高郵城)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원나라의 요청으로 유탁(柳濯), 인당(印當) 등과 함께 원병을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이듬해 돌아와 부인 장씨의 추문을 듣고 절연함으로써 원한을 사게 되었다. 1356년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할 때 그 잔당을 체포하지 않았다는 원호(元顥)의 무고로 한가귀(韓可貴)와 함께 투옥되고, 이어 부인 장씨의 외삼촌인 판사 김성(金成)의 농간으로 참살되고 가산도 적몰당하였다. 뒤늦게 왕이 구영검의 억울함을 알고 중지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효수된 뒤이므로 시신을 거두게 하고 재산도 돌려주었다.

6. 인당 장군

인당은 고려 말 풍운의 공신이다. 고려 충혜왕(忠惠王)에서 공민왕(恭愍王)까지 4대에 걸쳐 문과 대언 참지정사(文科代言參知正使), 만호(萬戶), 포왜사(捕倭使) 등 요직(要職)을 역임하였다. 1345년(충목왕 1)엔 밀직사(密直司)가 되었으며 서남면령 만호(西南面令萬戶)로서 1351년(충정왕 3)엔 이권둔(李權屯)과 함께 자연도(紫燕島), 삼목도(三木島)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서강(西江)에서 막았다. 1354년(공민왕 3) 석성 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서 내란중인 원나라에 원군으로 파견되었다가 평정된 후 귀국하여 전라도 만호가 되었다. 왕이 시키는 대로, 원나라가 쇠퇴하여 가므로 압록강 이서의 팔참(八站)을 공격하여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공파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원나라는 고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였고, 왕은 죄를 인당에게 돌리고 부득이 인당의 목을 베어 허물을 진사(眞謝)하였다. 뛰어난 무장으로서 비극적인 종말이었다. 인당교동(橋洞) 인씨(印氏)면천면(沔川面) 죽동리(竹東里) 아미산충정사(忠貞祠)라는 사당(祠堂)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현재 면천군은 옛 영화를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비록 면천군은 사라졌지만 역사를 빛낸 면천의 무수한 인물들과 문화유적은 오늘의 당진시를 있게 하는 살아 있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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