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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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공식명칭 | Clothing Habits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효경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에서의 옷과 관련한 생활 양상.
[개설]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에서는 1950년대까지 명주, 삼, 모시, 무명 등을 재배하여 직물로 생산하였다. 길쌈을 하던 시절에는 가을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쉴 사이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부여군 내의 전 지역에서 목화를 재배하였고, 다른 작물은 지역별로 각기 달랐다. 양화면·임천면·초촌면의 강가 주변에서는 모시를 생산하였고, 부여읍·은산면 등의 내륙 지역에서는 명주를 생산하였다. 부여읍 내에서는 삼베나 모시 등을 재배하지 않고, 누에만 쳤다.
[부여 지역에서 옷을 만드는 법]
부여 지역의 사람들은 무명으로 사철 옷을 지어 입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명주를 공출하여 갔기 때문에, 옷을 짓기 위하여 일본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어서 작업을 하였다. 베틀을 산중으로 옮기고 여자들이 산중에 모여 명주를 짰다. 다른 작물과 달리 명주는 고가에 환전(換錢)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특히 집안 여자들이 시집갈 때 큰 비용을 마련하여야 하였기에, 명주는 딸이나 시누이 등을 시집보낼 밑천이 되었다. 공출로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숨어서까지 명주를 짠 배경이다.
명주 길쌈을 하기 위하여서는 여자들이 모여서 명주 두레를 하였다. 실을 자을 때에는 친분 있는 여자들이 방 넓은 집에 모여서 물레질을 하였다. 다른 일과 달리 혼자서 물레질을 하려면 지하였기에 여럿이 모여서 공동 작업을 한 것이다. 작업량이 많을 때는 품앗이를 하기도 하였다.
[부여 지역의 여름옷 재료, 삼과 모시]
부여 지역에서는 삼베와 모시로 여름철에 옷을 지어 입었다. 삼베는 주로 일복과 일상복으로 짓고, 모시는 어른들의 옷이나 외출복으로 지었기 때문에 삼이 모시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다. 절기상 하지(夏至)[양력 6월 21일경] 즈음이 되면 심어 둔 삼을 벤다. 자라는 대로 베어서 모아 둔다. 여름철 복더위에 삼을 베는 일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더 큰일은 삼을 찌는 일이었다.
삼을 베고 찌고, 옷감을 만드는 모든 작업이 여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삼과 관련한 일을 하면 여자들이 집안일을 할 여력이 없다. 삼은 냇가로 가져가서 구덩이에 파묻고, 위에 불을 놓는다. 불이 꺼지면 삼을 꺼내서 껍질을 벗겨 말린다. 벗긴 삼 껍질은 수시로 가늘게 쪼개어 도투마리에 감아 둔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실을 뽑아서 잿물에 삶아 뽀얗게 만든 후 다시 도투마리에 감아 둔다. 이렇게 2차 작업을 마치면 짬이 날 때마다 베틀에 걸어 짠다.
모시는 부여에서 재배한 후 직접 짜기도 하였지만 인근 서천군의 모시 장에 태모시로 팔았다. 한산 세모시가 워낙 유명하였기에 태모시 거래가 매우 활발하였다. 그러나 1950년 이후 나일론 등의 합성 섬유가 보급되면서 길쌈은 서서히 중단되었는데, 다른 작물보다 목화 재배를 가장 먼저 중단하였다.
[부여 지역 의생활의 변화]
의생활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오일장이던 부여장이 상설장으로 바뀌면서 기성복을 팔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69년에 오일장이던 부여장은 부여읍 관북리에 있던 장이 부여읍 구아리로 이전하면서 상설장이 되었다. 이때 장시마다 곡물, 잡화 등과 더불어 기성복을 팔기 시작하였고, 더 이상 집에서 직물을 직접 생산하지 않게 되었다. 1970년대에 부여군 내에 양장점, 양복점 등이 들어섰고, 기성복과 더불어 맞춤복이 보급되었다. 1980년대 이후 고속버스가 보급되면서 서울에서 많은 옷들이 부여로 유입되었고, 장시에 옷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는 판매상들이 많은 옷들을 제공하였다. 지금은 다양한 옷가게에서 편리하고 다양한 의생활 용품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