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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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Korean ㄹfarmer's cooperative group|Dury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논매기를 목적으로 조직한 마을 단위의 공동 노동 조직.
[개설]
두레는 전통사회에서 농민들이 농번기에 공동으로 농사일을 하고자 만든 마을 단위의 조직이다. 두레의 역사는 17~18세기 새로운 농법으로 뿌리를 내린 이앙법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앙법이 논농사에 자리 잡으면서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필요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공동 노동 조직으로 두레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충청남도 부여군의 두레는 주로 논농사에서 김매기를 목적으로 해마다 김매기 철에 조직되는 한시적인 공동 노동 조직이다. 논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논매기를 통한 제초 작업이 곧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였기에, 단기간에 집중적인 노동력을 논매기에 투입하여야 했다. 이러한 문제를 공동체 내부에서 해결하고자 조직되고 활성화된 것이 바로 두레였다.
[두레의 구성]
두레는 생활 문화를 공유하는 자연촌 단위로 조직되었다. 따라서 규모가 큰 마을은 으레 두세 개의 두레가 조직되는 것이 보통이다. 두레 조직은 농사의 상징인 농기와 풍물을 갖추고 있었다. 두레의 일꾼은 마을에서 가장 왕성한 노동력을 보유한 청장년층이 주축이다. 두레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무적인 참여를 전제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두레가 조직되면 호당 한 사람의 일꾼을 내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으며, 좌상(座上)과 공원(公員)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갖추었다. 두레는 군대처럼 엄하게 규율을 단속하였는데, 공동 노동의 특성상 기강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두레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곧 성인으로 대접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해 두레에 처음 참여하는 젊은이는 별도의 주연을 베풀거나 술 한 말을 내는 관행이 있다. 부여 지역에서는 이를 진서술·진서턱·꼼[꽁]뱅이술이라 한다. 이처럼 신입례를 거쳐야 비로소 품값도 반품이 아닌 온품을 받고 품앗이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임원]
부여의 두레 조직은 좌상·공원·문서(文書)·총각대방(總角大方) 등의 임원이 있다. 두레의 총책임자인 좌상은 영좌(領座) 또는 공원좌상(公員座上)으로도 불리며, 마을에서 덕망이 있고 농사의 경험이 풍부한 적임자를 추대하는 것이 보통이다. 공원은 좌상을 보좌하여 논을 매는 현장에서 두레꾼들을 진두지휘하는 일종의 작업반장이다. 이 밖에 문서는 그날그날 작업 현황과 출결, 품값을 장부에 기록하는 역원이고, 총각대방은 장가를 가지 않은 일꾼을 통솔하는 노총각이다.
[논매기]
모내기를 마치고 20일 남짓 지나면 모포기 사이로 잡초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이즈음에 부여 지역의 마을들에서는 두레를 조직하여 논매기에 들어간다. 이를 위해 대동 회의를 열고 두레의 역원 및 품삯, 작업 순서 등을 결정한다. 품삯은 한 마지기를 기준으로 하되 지심[잡초]의 많고 적음, 토질 등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한다. 즉 풀이 많아 작업이 어려운 논은 상답(上畓)으로 쳐서 더 많은 품삯을 받았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논은 하답(下畓)이라 하여 차등을 두었다.
논매기는 아시매기[초벌매기], 이듬매기[두벌매기], 만물[세벌매기]이 있다. 두레의 공동 노동은 아시매기와 이듬매기에 국한되었다. 마을에 따라서는 모를 심는 날짜가 다른 까닭에 이듬매기만 두레로 논을 매고, 아시매기와 만물은 품앗이나 놉[품팔이 일꾼]을 얻어 해결하기도 한다. 논을 매는 방식은 아시매기와 이듬매기는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고, 만물은 두 손으로 논의 풀을 훑는 식이다.
[현황과 의의]
부여 지역의 두레는 지난날 열악한 농사 환경을 상부상조하는 공동의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한 본보기이다. 하지만 1945년 광복 이후 점차 소멸의 길을 걸었는데, 특히 1970년대 이후 농사 기술이 현대화됨에 따라 대부분의 마을에서 두레의 공동 노동 전통은 사라졌다. 다만 일부 마을에서는 두레에서 사용하던 농기와 풍물놀이가 아직 전승되고 있는데, 두레의 전통 속에서 해마다 수행되며 연희되던 일노래·두레풍장·기세배·두레싸움·호미씻이 등의 대동놀이 전통이 마을 문화의 근간으로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 무형문화재[현 충청남도 무형유산]로 지정된 세도두레풍장과 근래 복원된 추양리두레풍장은 일과 놀이가 하나로 기능했던 전통 시대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