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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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運動 |
영어공식명칭 | Righteous Army Movemen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엄기석 |
[정의]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의병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자발적으로 조직된 군대이다. 의병운동(義兵運動)의 전개는 크게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일제 강점기로 나눌 수 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부여 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여 출신 또는 부여 지역과 관련된 인물들이 의병장 또는 의병으로 활약한 사례는 다수 있다.
[부여 지역과 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일본군이 부산진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도읍인 한양을 목표로 빠르게 북상하였다. 조선 조정은 파천을 결정하고 의주까지 피난하였다. 그사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남해안에서는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바다를 통한 대규모 군사 이동이 저지되었다. 또한 명나라 원병의 참전과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 관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남부 지방으로 물러났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부여 지역에서 의병의 전투 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부여 출신 인물과 부여 지역과 관련된 인물들이 의병장 또는 의병으로 활동한 사례는 다수 있다.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묘와 비가 있는 정득열(鄭得說)[?~1592]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5세손이다. 사천현감(泗川縣監)이었던 정득열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300여 명의 민병을 모아 진주성대첩에서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활약하였다. 그러나 전투 과정에서 경상우병사(慶尙道右兵使) 유숭인(柳崇仁)을 구출하다가 적의 포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후에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부여 정득열 묘 및 비는 2001년 1월 3일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48호로 지정되었다.
다른 인물로는 이지례(李之禮)[?~1592]가 있다. 이지례는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형 이지시(李之詩)가 용인전투에서 위급해지자 출전하였지만 결국 순절하였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부여군 남면 내곡리에 있는 동절사(同節祠)에 배향되었다.
1597년(선조 30) 일본의 재침입으로 시작된 정유재란 당시 부여를 비롯한 충청도 일대가 전쟁터가 되었다.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전방위로 북상하며 수도인 한양을 압박하였다. 일본군은 남원과 전주를 거쳐 공주까지 올라왔는데, 부여 지역 역시 이때 일본군의 침입을 받아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정유재란 기간에도 부여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이어졌다. 홍산[현 부여군 홍산면] 출신인 이함림(李咸臨)은 정유재란 때 창의군(倡義軍)을 모아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아버지 이대인(李大仁), 형 이간림(李簡臨)과 순절하고 말았다. 이관민(李寬民)은 창의군 수천을 모아 한양을 지키기 위하여 북상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전투 끝에 승리하였다. 하지만 공신에 오르지 못하고 후에 홍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조헌(趙憲)을 따라서 의병 활동에 참여한 인물들이 있었다. 대부분 조헌의 문인들이었으며 부여 지역에서는 유봉(柳菶), 이강(李玒), 박혼(朴渾)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