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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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基燮 |
영어공식명칭 | Yu Giseo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석 |
출생 시기/일시 | 1905년 1월 2일 - 유기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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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월 - 유기섭 비밀 결사 화성당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유기섭 농민조합 조직 시도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6월 - 유기섭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 선고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5월 - 유기섭 비밀 결사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 결성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7월 - 유기섭 대야구락부 조직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8월 - 유기섭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11월 25일 - 유기섭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5월 21일 - 유기섭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유기섭 대통령 표창 수훈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유기섭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출생지 | 중정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 |
활동지 | 부여 - 충청남도 부여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유기섭(柳基燮)[1905~1936]은 1905년 1월 2일 부여군 세도면 중정리[현 부여읍 중정리]에서 아버지 유병위(柳秉蔚)와 어머니 은진 송씨(恩津 宋氏)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조선일보 부여지국 기자를 지냈다. 1926년 부여청년회에 가입하였고, 11월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재무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부여청년회에서 주요 활동으로 결의한 야학 설립에 힘을 쏟아 중정리에 대왕의숙(大旺義塾)을 설립하여 아동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유기섭은 1931년 강일(姜日)[강성구(姜星求)]·서진(徐震)과 함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비밀 결사 화성당(火星黨) 결성을 추진하였고, 형평사 부여지부 회원 김동진(金東眞)·박주완(朴周完)과 부여농민조합원 강병무(姜秉武)에게 가입을 권유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31년 1월 규암면 합송리 농민학원에서 결당식을 거행하고자 하였으나 김동진 등이 가입 권유를 거절하는 등 당원 모집이 저조하여 활동을 중단하였다.
유기섭은 화성당이 동맹 휴학의 배후로 지목되어 1931년 4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1년 1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검사가 항소하였고, 1932년 6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강일과 함께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유기섭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 전인 1931년 1월 15일 홍산면에서 결성된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에 참여하였다. 이후 10월에 금강문인회는 공산주의연구협의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33년 3월에는 공산주의자협의회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부여군 내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주력하였고, 5월에 비밀 결사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를 설립하였다. 7월에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의 대외 위장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만들어 조직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유기섭은 1933년 8월 이른바 금강문인회사건 또는 금강공산협의회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다시 체포되었고, 체포된 지 2년 만인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5월 21일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기섭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