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021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전우치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석성면 파진산에서 도술을 얻은 전우치]
전우치는 조선 전기 일세를 풍미한 인물 설화의 주인공이다. 전우치는 실존 인물이었지만 정사(正史)에 기록된 바가 없어 정확한 생애를 파악할 수 없다. 단지 조선 전기의 기인이자 환술가(幻術家)로 전할 뿐이다. 일설에 전우치는 송도에 살았던 선비였고, 도술(道術)을 연마한 술사로서 이단적 사상에 기울어져 반역적인 행위를 하다가 옥사한 인물로 되어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1614]에서는 전우치가 서울 사람이라고 하였고, 또 일부 자료에서는 담양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자료는 사실과 전혀 다른 와전이다. 전우치에 관한 기록이 미미한 것은 기묘한 도술 행각으로 민심을 현혹하였다는 죄로 관의 추적을 받자, 친척들이 이름을 감추기 위하여 비석까지 땅에 묻고 담양인으로 바꾸는 등 근계(根系)를 숨겼기 때문이다. 실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석성현(石城縣) 인물 조에 전우치는 첫 번째로 등재되어 있다. “진사 전우치는 남양인(南陽人)이며, 파진산(破陣山)의 오래된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산신을 만나 비결(秘訣)을 얻었다. 이로써 전우치의 도술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우사(羽士)라 칭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남양전씨대동보(南陽田氏大同譜)』에도 전우치는 진사이고, 입산 수도하여 도술을 얻은 신출귀몰한 도술가인데, 백성을 현혹한 죄를 지어 관에 쫓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우치의 고향은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이다. 봉정리는 곤향산(坤向山)을 등지고 백마강(白馬江)과 석성천(石城川)이 조우하는 강가의 마을이다. 지난날 논산의 강경장(江景場)과 부여의 임천장(林川場)을 잇는 요충지였다.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성씨는 남양 전씨(南陽 田氏)로 알려져 있다. 석성면(石城面)과 연고를 맺은 인물은 고려 후기 전득우(田得雨)이고, 최초의 사적지는 봉정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4㎞ 떨어진 우곤리 서당말[현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이다. 이후 전득우의 아들 전흥(田興)[1376~1457]이 봉정리로 이주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봉정리는 남양 전씨가 600년의 세계(世系)를 이어 온 집성촌이다. 석성면에 정착한 남양 전씨는 조선 초기에 문과 급제자가 나오고, 효자 정려(旌閭)가 내려졌을 정도로 지역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남양 전씨가 배출한 인물 중에서 단연 주목할 만한 인물은 전우치이다. 전우치는 입향조 전흥의 증손이고, 어모장군(禦侮將軍) 전지(田漬)의 네 아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전우치는 기묘사화(己卯士禍)[1519] 때 조광조(趙光祖)[1482~1519] 일파로 몰려 은거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봉정리 백마강 변 파진산의 오래된 절에서 산신을 만나 비결을 얻은 뒤 사물과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전우치가 득도한 내력은 부여에 전하는 설화에서도 확인된다. 즉, 파진산에서 도를 닦을 때 밤마다 예쁜 여자로 변신하여 수련을 방해하던 여우가 있었다. 어느 날 전우치는 여우의 입속에서 꺼낸 구슬을 얻는다. 그리고 파진산 신선에게 신선의 비결을 얻은 뒤 득도하여 신선계에 올랐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는 '전우치 설화'의 다양한 양상]
전우치 설화는 다양한 양상으로 전한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1741]의 「한죽당필기(寒竹堂筆記)」에는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 역질(疫疾)이 퍼지자 도술로 예방하였다고 한다.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는 문하생을 찾아가서 『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을 빌려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는 전우치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뒤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작자 미상의 「전우치전」에도 실려 있다. 또한 『어우야담(於于野談)』[1621]에는 사술로 백성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신천옥에 갇혔는데, 옥사하자 태수가 가매장을 시켰다고 전한다. 이틀 뒤에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무덤을 파니 시신은 없고 빈 곽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 식사 중에 밥알을 내뿜어 흰나비를 만들고, 천도복숭아를 따기 위하여 새끼줄을 타고 올라갔다는 설화 등은 우리나라 도가의 맥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전우치전」은 각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홍길동전」을 연상케 하는 권선징악의 골격은 대동소이하다. 전우치는 신기한 도술을 얻었으나 재주를 숨기고 살아가다 빈민의 처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상의 선관(仙官)으로 가장한 뒤 임금에게 나타나 옥황상제의 명령이니 황금 들보를 만들어 바치라고 하였다. 황금 들보를 팔아 곡식을 장만한 전우치는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나라에서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전우치를 잡아들였다. 그러나 전우치는 감옥에서 쉽게 탈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횡포한 무리를 징벌하고 억울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남양 전씨의 집성촌인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포사마을과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서당말 일대에서는 전우치의 도술에 얽힌 흥미로운 설화가 다수 전승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에 있는 은행나무를 심은 장본인으로 구전된다. 둘레 8m, 높이 25m인 개척리의 은행나무는 수령 500년의 거목이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서 있는데, 일명 ‘전우치 나무’라고 불린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개척리 은행나무는 전우치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인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구(金絿)[1488~1534], 김정(金淨)[1486~1521], 김안국(金安國)[1478~1543] 등과 교류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도피 유랑 중에 개척리에 이르러 가지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언덕에 꽂았는데, 그 뒤로 지팡이에서 새싹과 잎이 돋고 가지가 나와 은행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전우치는 “이 지팡이가 자라면 남양 전씨가 번창할 것이고, 죽으면 남양 전씨는 남의 그늘 속에 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혹은 “이 지팡이에서 싹이 돋으면 내가 살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민초들의 애환을 달래 주는 카타르시스]
봉정리를 비롯하여 부여 지역에 전하는 전우치 설화는 수십여 가지에 달한다. 구비 문학의 특성상 ‘전우치 전설’은 실제 이야기 현장에서 대중들에 의하여 변이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우치 설화의 각편은 확장성을 통하여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또한 화자의 관점에 따라 대상 인물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부정적 인식의 양면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전우치 설화들은 모두 전우치의 기발한 도술 행위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권세가들의 기득권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힘없는 민초들에게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며 널리 퍼져 나간 원동력이다.
전우치 설화는 에피소드별로 10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도술을 얻기와 배우기, ② 관군의 포박에서 풀려나기, ③ 백성에게 쌀 나누어 주기, ④ 재상가의 잔치 훼방하기, ⑤ 벌이 되어 왕비의 음부 쏘기, ⑥ 허벅지를 베어 땔감 만들기, ⑦ 인색한 참외 장수 골탕 먹이기, ⑧ 동자에게 천도(天桃) 따 오게 하기, ⑨ 밥을 나비로 바꾸기, ⑩ 중국 황실 조롱하기, ⑪ 신천옥에서 옥사, ⑫ 신선이 되어 떠나기, ⑬ 전우치를 능가한 백강 이씨 도술 등이다. 부여 지역에서 회자되는 전우치 설화는 자생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고전 소설 「전우치전」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윤색되거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과정에서 덧붙는 것도 있다.
부여 지역에서 전승되는 대표적인 몇 가지 설화를 살펴보자.
「관군의 포박에서 풀려나기」는 관군에게 쫓기던 전우치가 잡혔는데, 소원이 하나 있다며 붓과 먹을 달라고 부탁한다. 관군이 붓과 먹을 가져다주니 전우치는 금강산을 그리고 옆에 굴과 말을 그려 놓더니 말을 타고 그림 속의 금강산 굴로 들어가 버렸다. 전우치가 관군에게 체포되었을 때 기지를 발휘하여 유유히 빠져나간 내용이다.
「중국 황실 조롱하기」는 중국에 간 전우치가 황제에게 지금 하늘에서 집을 짓는데, 들보 하나가 부족하니 금으로 들보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황실에서는 하늘에서 왔다는 전우치의 말을 믿고 황금 들보를 만들어 주었다. 전우치가 황금 들보를 타고 조선으로 넘어오는데, 당시 중국에서 천기를 잘 보는 사람이 “조선에는 전우치라는 사람이 있다더니, 바로 저놈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방해를 놓아 전우치가 황금 들보를 가져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국이라 여겼던 중국 황실을 전우치가 조롱한 내용이다.
「관아의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이야기」는 의적형 설화의 전형이다. 요지는 이러하다. 임천의 관아에 쌀 창고가 있었는데 쌀이 매일 조금씩 줄어들었다. 쌀이 줄어든 까닭을 알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창고지기가 유심히 관찰하니 창고에 넣어둔 쌀이 공중으로 날아서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쌀을 뒤쫓아 가니 전우치가 도를 닦고 있는 파진산으로 향하였다. 전우치는 관아에서 가져온 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장난꾸러기처럼 밝고 경쾌한 전우치]
설화 속에 등장하는 전우치는 의로운 영웅이지만 결코 진지하거나 근엄하지 않다. 항상 밝고 경쾌하며 때로는 장난꾸러기 같은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인색한 참외 장수 골탕 먹인 설화」가 좋은 예이다. 전우치가 석성 봉두정(鳳頭亭) 나루에 당도하니 참외 장수가 배를 타려고 하였다. 전우치가 참외 장수에게 참외 하나를 달라고 하였지만, 참외 장수는 박절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전우치가 참외 하나를 사서 배 안에 모래를 깔고 씨앗을 심었다. 그랬더니 참외 씨앗을 심은 곳에서 바로 싹이 돋아나고 줄기가 뻗어 노란 참외가 주렁주렁 열렸다. 전우치는 참외를 따서 나룻배에 탄 사람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배불리 먹였다. 나루에 도착한 참외 장수가 짐을 내리려고 지게를 보니 참외가 남아 있지 않았다. 전우치가 인색한 참외 장수를 골탕 먹이려고 눈속임으로 참외를 나눠 준 것이다.
「허벅지를 베어 땔감을 만든 이야기」도 유사하다. 어느 날 배가 고픈 전우치가 어떤 집에 들어가서 밥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주인이 쌀은 있는데 나무가 없어서 밥을 못 하여 준다고 핑계를 대었다. 전우치가 낫을 가져오라 하여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내자 나무가 뚝뚝 떨어졌다. 주인이 전우치가 만들어 준 나무로 밥을 하였다. 밥을 잘 얻어먹고 전우치가 집을 떠났는데, 나중에 보니 집안의 기둥 위쪽이 깎여 있었다.
「벌이 되어 왕비의 음부를 쏜 설화」는 화자의 기지가 빛을 발한다. 벌로 변한 전우치가 왕실에 갔을 때 마침 한 여자가 요강에 앉아 오줌 누는 것이 보였다. 전우치는 요강 속으로 날아들어 가 여자의 음부에 침을 쏘고 달아났다. 침을 쏘인 여자는 바로 왕비였는데, 전우치가 쫓기는 신세라서 임금에게 복수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설화 속에 등장하는 전우치는 야박하거나 몰인정한 사람에게는 적당히 골탕을 먹이고, 약자인 민중의 편에 서서 강자인 권력자에게 저항한다. 또한 도술을 부리는 신이한 인물이면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극단적인 복수가 아니라 가벼운 응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힘없는 백성의 편에서 늘 백성들의 시름을 달래 주었기에 전우치는 오랫동안 민초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불완전하지만 시대에 부응한 민중의 영웅]
전우치는 파진산에서 도술을 배워 신통력을 얻었지만, 신통력이 완성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인물 전설이 그러하듯이 전우치는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는 불완전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우에게 속은 이야기」와 「전우치의 도술을 능가한 백강 이씨」 등은 좋은 예이다. 「여우에게 속은 이야기」는 여우에게 속아 도술을 완성하지 못하였다는 설화이다. 어느 날 전우치가 사랑방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예쁜 처녀가 들어와 방해를 하였다. 화가 난 전우치가 요망하다고 호통을 치며 여자를 잡아 대들보에다 묶어 놓으니 여자의 겨드랑이에서 도술 책이 떨어졌다. 책이 재미있어 한참을 푹 빠져 읽고 있는데, 여자 종이 와서 어머니가 아파서 죽게 생겼다고 고하였다. 전우치는 의아하였지만, 책을 놓고 황급히 가 보니 어머니가 멀쩡하게 손자를 업고 있었다. 여우가 책을 못 읽게 하려고 종으로 둔갑하여 훼방을 한 것이다. 아차 싶어서 다시 방으로 와서 문을 열고 보니 책도 여자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책을 다 읽었으면 도술이 더 높았을 텐데 아쉽게도 일부만 읽었기 때문에 비법을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전우치의 도술을 능가한 백강 이씨 설화」는 불완전한 민중의 영웅 전우치의 모습을 잘 드러난다. 옛날에 도술을 잘 부리는 백강 이씨가 살았다. 전우치는 백강 이씨에 비하여 도술 실력이 부족하였다. 하루는 전우치가 백강 이씨의 딸을 탐하여 깔따구로 변한 뒤 요강 속에 들어가 있었다. 백강 이씨가 알아채고 딸에게 뚜껑을 닫고 요강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고는 전우치에게 요강 밖으로 나오라고 호통을 쳤다. 전우치가 요강 밖으로 나오면서 두 사람은 도술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도술 책을 통달하지 못한 전우치는 번번이 져서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처럼 전우치가 자신보다 도술이 뛰어난 고수를 만나 치욕을 당하는 존재로 그려진 것은 조선 시대 부여 지역에서 세도가 당당하였던 백강 이씨의 위세가 반영된 산물이다. 따라서 설화에 등장하는 백강 이씨는 도술에 정통하였다는 뜻에서 원술(元術) 또는 정술(正術)로 묘사되고, 전우치의 도술은 한갓 잡술(雜術)로 회자되기도 한다.
전국에 분포한 광포 설화는 단순하면서도 흥미로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 화자는 하나의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 않고 핵심 내용만 기억하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전우치 설화의 생명력은 대중이 원하는 세계를 충족하기에 적절한 서사 구조에 있다. 무엇보다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영웅적인 면모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었다. 전우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대리 만족한 까닭이다. 더구나 전우치 이야기는 훗날 소설 「전우치전」으로 작품화되면서 더 큰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힘없는 백성들을 돕고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의인의 모습을 구현함으로써 오래도록 대중들의 사랑을 획득한 것이다. 결국 전우치 설화의 전승 주체는 ‘부여’라는 특정 지역을 뛰어넘어 억압된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다수의 민초들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