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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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聖模 |
영어공식명칭 | Kang Seongm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석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11월 19일 - 강성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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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강성모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부여에서 궐기 촉구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12월 7일 - 강성모 일제 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11월 20일 - 강성모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8월 6일 - 강성모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 강성모 대통령 표창 수훈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강성모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장하리 -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
활동지 | 부여 - 충청남도 부여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강성모(姜聖模)[1915~1940]는 1915년 11월 19일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서 태어났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부여에서 강일(姜日)[강성구(姜星求)]·강병국(姜秉國) 등과 함께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고 학생들에게 함께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후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문맹 퇴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3년 4월부터 장정야학당에서 한글교사로 활동하였다. 부여농업보습학교에서 동맹 휴학을 선동하고 화성당(火星黨) 사건 주모자로 체포된 강일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강성모는 부여군을 중심으로 충남 지역 금강 연안의 서천·논산 등 각 군을 망라하는 금강공산협의회에 참여하여 각 촌락에 농민 야학을 개설하고 아동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홍산노동구락부에 가입하고 홍산노동구락부를 비밀 결사인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로 만드는 데에 참여하였다. 장하리 장정마을은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었으며, 강성모는 강일을 도와 강병국·강주구·강병욱(姜秉郁)·강병환(姜秉煥) 등의 장정야학당 교사들과 함께 칠모회(七眸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강성모는 이후 감병국·강일구(姜日求)·최재봉(崔在鳳)·장창선(張昌善)·전영철(田泳喆)·조병철(曺秉喆)·허원범(許元範)·노명우(盧命愚)·강도형(姜道馨) 등과 항일 지하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던 중 1933년 12월 7일 금강문인회사건 또는 금강공산협의회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5년 1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2년여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강성모는 만주의 간도 연길현으로 이주하였으며, 1940년 8월 6일 연길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강성모의 공적을 기려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